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 간의 단일화 논의가 본격화됐다. 이 시점에서 시계추를 돌려 역대 대선에서의 단일화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선 후보 단일화는 해방 후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제도가 도입됐던 시기부터 끊임없이 시도됐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단일화가 이뤄졌던 역대 대선만 골라봤다.
역대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가 본격적인 이슈로 떠오른 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다. 당시 야권은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에 맞설 강력한 후보가 필요했다. 야권의 선두는 민주당民主黨 신익희 대표최고위원이었다. 여기에 2대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후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 조봉암 후보도 있었다.
신익희-조봉암 양 진영은 자유당 정권의 교체를 위해 후보 단일화 논의에 들어갔다. 이 때 양 후보가 취한 단일화 방식은 국가 원로들의 중재를 통한 ‘담판’이었다. 조봉암 후보가 신익희 후보와의 단독회담에서 자신이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겠다고 했다. 조건은 다음 대선에 단일후보로 조봉암 후보가 나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단일화는 극적 발표 없이 유세 도중 신익희 후보의 사망으로 정리됐다. 신익희 후보의 사망 이후 조봉암 측의 박기출 부통령 후보가 사퇴해 조봉암 후보가 민주당과의 단일 후보라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강력한 단일 진영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후보 단일화를 통한 양 진영의 공약 등 정책 공조가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고, 인물 구도로만 선거가 치러지게 된 것이다. 결과는 야권의 참패였다. 이승만 자유당 후보가 504만6437표(득표율 70%)를 얻은 반면 조봉암 후보는 216만3808표에 그친 것이다.
무효 185만6818표와 기권 53만9807표를 합친 표수가 조봉암 후보가 얻은 것보다 많았다. 조봉암 후보와 무효•기권표의 합이 이승만 후보의 득표수보다 48만6000표 낮기는 했지만 양 진영이 강력한 단일 진영을 형성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1997년 DJP 연합을 통해 승리한 김대중 후보는 39만표, 1.6%의 득표차로 승리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57만표, 2.3%의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일각에서는 무효표가 사망한 신익희 후보를 향한 동정표라는 분석도 많다. 당시 민심은 형식적 단일후보가 아닌 살아있는 권력을 선택했다. 야권이 외친 정권 교체 열망도 사라졌다.
이후 우리 정치사는 정치 세력 간의 분열로 치닫는다. 3공화국을 거쳐 정치사의 결정적 변곡기의 중심에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이 있었다. 1980년 김영삼-김대중이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를 논의했지만 전두환 군사세력의 군화발에 짓밟히고, 체육관 선거로 꿈을 접어야 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국민의 손으로 쟁취했지만 김영삼-김대중 양대 진영은 13대 대선에서 단일화에 실패했다. 결과는 5공의 후계자인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의 당선이었다.
14대 대선에서는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와 김대중 민주당 후보가 야권 후보로 나섰지만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패했다. 13대, 14대 대선에서 야권 후보들이 얻은 득표수의 총합은 집권당의 후보보다 높았다.
3공화국 이후 정권교체를 실현한 선거는 15대 대선이다. 15대 대선은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 3파전으로 치러졌다. 판을 흔든 것은 DJP연합이다.
1956년 형식적 단일화의 참패
1996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에 그치자 김대중(DJ) 총재는 자유민주연합 김종필(JP) 총재와 연대를 모색했다. 김대중 총재는 김종필 총재의 꿈이었던 ‘내각제 개헌’을 제시하면서 1997년 11월 3일 DJP연합을 출범시키는데 성공했다.
DJP연합은 대선에서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라는 결과를 낳았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조순 민주당 총재를,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는 박찬종 신한국당 고문과 연대했지만 DJP연합의 벽을 넘지 못했다. DJP는 뭉쳤는데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는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와 분열한 결과다.
DJP 연합이 강력한 파급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양대 세력이 정치권력을 나눠 가진다는 합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합의는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였다. 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고, 경제부처의 임명권은 총리가 가지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통한 연합정부 창출이다.
정권창출 후 이 같은 약속은 지켜지는 듯했다. 김종필 총재가 총리가 됐고,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자 새천년민주당(전 새정치국민회의)은 자당의 당선자를 자민련에 입당시켰다. 하지만 최대 합의였던 내각제 개헌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DJP 연합은 정권창출 3년 만에 결별을 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후보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각종 여론조사와 민주당 당원들의 탈당러시를 놓고 보면 자신이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야권 단일화의 대세가 정몽준 후보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는 자신이 줄곧 주장해온 국민참여 경선을 접고, 정몽준 후보가 선호했던 일반국민 여론조사 방식을 받아들였다. 두 후보의 단일화는 정책 연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일화를 결정짓는 여론조사는 “이회창 후보에 대항할 수 있는 후보로 누가 적합하느냐”를 묻는 것이었다.
결국 2002년 11월 25일, 양측은 단일후보로 노무현을 확정했다.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따돌린 것이다. 단일화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단일화 직후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역전한 것이다. 하지만 호재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기에 대선 투표를 하루 앞둔 2002년 12월 18일 밤 10시 정몽준 후보가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파기 이유는 선거 유세과정에서 차기 대권 후보로 정몽준 후보를 배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의 집으로 뛰어갔다. 추운 겨울날 야권의 대선 단일후보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 모습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단일화 효과가 잦아들 무렵 벌어진 정치 빅이벤트는 반 한나라당 계층을 투표장으로 결집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강력한 단일화는 DJP 연합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1201만 4277표(48.9%)를 얻어 1144만3297표(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다. 후보 단일화가 대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펼치지만 이것만으로는 승패를 확정 짓지 못한다. 이는 역대 대선에서의 후보 단일화 사례가 보여준다. 1997년 DJP 연합을 통해 승리한 김대중 후보는 39만표, 1.6%의 득표차로 승리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57만표, 2.3%의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후보 단일화로만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역대 대선 중 단일화를 거친 선거에서 돌발 변수가 승패를 판가름 지었다.
56년 전 신익희-조봉암 후보는 신익희 후보의 사망이라는 변수로 물거품이 됐다. 1997년 DJP연합을 통한 단일화는 신한국당에서 탈당한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표를 잠식했다. 2002년에는 급기야 단일화 파기라는 강력한 변수가 돌출됐다.
하지만 선거에서의 변수는 예측할 수 없다. 결국 양대 진영이 국민들의 선택에 도움을 줄만한 정책 연합을 이뤄내야 한다는 뜻이다. 역대 대선에서 가치 지향이 다른 세력 간의 단일화가 약속 파기로 정치 혼란을 가져왔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성민 기자 icarus@itvfm.co.kr | @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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