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포해전 등 각종 전투에서 승리한 순신은 다음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본영의 탐보선이 달려와서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의 서간을 올렸다. 그 서간에는 4월 그믐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관서지방으로 몽진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순신은 엎드려 통곡하였다. 군중 모든 장졸도 북향하여 통곡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백성 이신동이 이순신의 승전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찾아왔다. “완전한 승리를 하시고 하니 참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대승첩입니다. 소인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부지하다가 우리 장수가 승전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모양이 하도 정성스럽고 측은해 보는 장졸이 모두 감동하였다. 그러나 순신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내 “적병이 그동안에 어찌 하였느냐”라고 물으며 적병의 행동을 탐문하였다.
이신동은 답했다. “적병이 어제 이 포구에 들어왔습니다. 포구에서 여염으로 돌아다니며 재물과 가축을 약탈해 사또께서 불살라 버린 배에 실었어요. 소를 잡고 술을 먹으며 소리를 질렀고, 피리도 밤새 불더라고요. 오늘 아침에 반은 배를 지키고 반은 뭍에 내려 고성읍내 방면으로 싸움을 하러 갔습니다. 소인은 노모와 처자를 데리고 적에게 쫓겨 길에서 서로 잃고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이같이 하소연하는 겁니다.” 순신이 측은히 여겨 “네가 여기서 있다가는 적이 되돌아오면 죽을지도 모르니 나와 같이 가는 게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신동은 이마를 조아리며 절하고 “적을 파하신 사또의 은택은 잊을 수가 없지만 노모와 처자의 간 곳을 모르니 소인은 혼자 사또를 따라갈 순 없습니다”며 “이제는 적이 거의 죽었으니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고 말한 후 배에서 내려갔다. 순신은 제장을 돌아보며 “이신동의 처지를 보니 제공의 소감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제장들은 “한마음으로 힘써 적을 토벌할 것을 다짐하겠소”라고 대답하였다.
순신은 곧 주사를 몰고 천성ㆍ가덕ㆍ부산 등지로 가서 적의 소굴을 복멸할 생각이 간절했지만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가 아직 오지 않아 출정하지 않았다. 미약한 힘으로 적의 근본인 부산으로 쳐들어가는 게 시기상조라고 여긴 거다. 그래서 거제읍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이억기의 주사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이억기는 젊은 장군으로 족히 믿을 만한 명장이었다. 이런 사실을 순신이 모를 리 없었고, 그가 돌아오길 학수고대한 까닭이다.
그때였다. 본영의 탐보선이 달려와서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의 서간을 올렸다. 그 서간에는 4월 그믐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관서지방으로 몽진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순신은 엎드려 통곡하였다. 군중 모든 장졸도 북향하여 통곡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심사가 답답했던 순신은 전군에 영令을 내려 본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 했다.
백성의 하소연에 전의 ‘불끈’

전 현감 조헌도 이순신과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일본군에 당하는 것에 의분이 들끓은 그는 김절金節, 박충검朴忠儉 등과 더불어 수백명을 모집해 충청도 보은報恩 차령車嶺의 험애한 곳에서 웅거했다. 경상도 곤양昆陽 출신 정기룡은 우로방어사 조경을 찾아가 적을 막을 방략을 말해줬다. 거창居昌 땅에서 적군 500여명을 격파한 정기룡은 조경과 함께 금산金山의 적을 쳤고, 김천역金泉驛에서 5급을 베고 돌아왔다. 힘이 대단하고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기가 있으며 천리마를 타고 나는 듯 재빠른 정기룡을 가리켜 적의 장졸들은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렀다. 정기룡은 체격이 웅장하여 신장이 8척이요 눈빛이 별과 같으며,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무덤을 지킴으로 효도를 다한 인물이었다.
본영에서 회영해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선조가 무사히 평양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새로이 병선과 군기를 정리하였다. 순신은 옥포 기타 각처 싸움에서 적의 병선 40여척을 분멸한 전말, 의뢰할 곳 없는 백성들이 승전한 수군 함대를 보고 기뻐하던 일, 그들을 안전지대로 옮겨오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 등을 세세히 기록해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전리품 명목은 다음과 같다.

순신은 빼앗은 전리품 중 백미 300여석을 여러 병선에 양미로 나눠줬다. 의복과 목면 등도 군사들에게 나눠줘 전의를 돋우게 하였다. 붉은 철갑, 검은 철갑, 각색 철투구, 각렵, 철가면, 금관, 금우, 금종, 우의, 우추, 나각 등 흉물스러운 것과 큰 쇠못, 동아줄은 감봉監封하여 창고 내에 보관하였다. 그중 무겁지 아니한 물건을 첩서(전승하였다는 장계)를 가지고 가는 편에 조정에 올렸다.
전쟁의 참혹함에 순신 ‘눈물’
하지만 순신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모든 백성을 챙기지 못한 채 회영했다는 거였다. 이번 싸움을 통해 도로 찾은 포로 중 계집아이 하나가 있었다. 동래부 동면 응암리鷹巖里에 사는 윤백련尹百連이라는데 나이는 14세였다. 이 아이의 말 속엔 전쟁의 참혹함이 그대로 들어 있다.
“나는 기장機張 고을 운봉산雲峯山에 숨어 피난하여 있다가 적병이 들어와 나를 붙들어 부산으로 데려갔어요. 그렇게 배 밑에 가둬놓고 임의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는 어느 날인지 몰라도 병선 30여척을 타고 김해로 왔죠. 일본군은 상륙해 노략질하다가 5~6일 후 다시 배에 올라 거제 율포로 간 것 같아요. 그 이튿날 옥포로 왔는데, 큰 싸움이 났어요. 내가 탄 배에 조선대포의 철환이 밥주발처럼 날아와 떨어지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그놈들이 맞고는 피를 흘리고 거꾸러지더라고요.
적군들이 견디지 못하여 무어라고 떠들며 물에 뛰어들어서 헤엄쳐 산으로 달아나 버렸는데 나는 갑판 밑에 숨어서 그 밖에는 몰라요.” 순신은 백련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런 정경을 당한 아이가 백련이 하나만 아닌 것을 생각하니 순신의 가슴은 아팠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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