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대가가 임진강臨津江을 건너는데 비는 퍼붓고 어두워서 지척을 알 수가 없었다. 유성룡은 도승渡丞(나루터를 맡은 관원)의 관사에 불을 놓으라고 명하였다. 이 오래 묵은 큰 집에 불이 붙자 강의 북쪽까지 환해져, 백주와 같았다. 참 묘한 계책이라고 모두가 칭찬하였다. 여기엔 적군이 뗏목을 만들 수 있는 재목을 없애 버린다는 의미도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감사 권징權徵은 군사 수십명을 데리고 따라왔다. 동파역東坡驛에 다다르니 파주坡州목사 허진許晋, 장단長端부사 구효연具孝淵 등이 지대원(공적인 일로 지방에 나간 고관의 음식과 물품을 조달하는 관원)으로 와서 음식물을 가져왔다. 시위하는 의장병儀仗兵들이 기갈이 심한 끝에 염치를 잊어버리고 난잡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선조는 언덕 위에 올라 임진강 저쪽의 산협을 바라보고 “우계 성혼成渾(한학자)의 사저가 어디냐”고 물었다.
난세가 됐으니 훌륭한 장수를 얻어야 했지만 선조는 여전히 문文을 숭상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시신들은 산변에 있는 성혼의 주택을 가리켰다. 선조는 “성혼은 어디 가고 나와 맞이하지를 않느냐”고 하였다. 시신들은 “거리가 멀어 미처 나오지 못하였을 겁니다”고 답하였다. 그때 황해감사 조인득趙仁得이 병마 수백기를 거느리고 마중을 왔는데 서흥瑞興부사 남억南嶷이 군사 200명과 말 50필을 가지고 먼저 왔다. 선조의 일행은 나누어 타게 되었다. 선조의 거마는 개성開城에 도착하였다. 1952년 5월 1일이었다.
선조를 따라왔던 몇몇 대관이라는 무리들이 기세등등하게 영의정 이산해를 탄핵하였다. 이유는 이랬다. “수상이 되어 국정을 잘못 운영했다. 그로 인해 왜란을 불러일으켜 성상이 몽진의 고초를 당하였다.” 서인들은 개성 백성을 선동, 이산해를 탄핵 상주했고, 그를 나라를 그릇되게 만든 신하로 몰아댔다. 서인들은 한양에서 개성까지 오는 동안에 배 고프고 다리 아픈 책임을 이산해라는 동인의 늙은이에게 덮어씌우려는 거였다. 그들은 이산해보다도 좌의정 유성룡을 더 미워했지만 한꺼번에 둘을 치는 건 전술상 불리한 줄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산해를 먼저 공격하는 것이었다.
파천播遷의 길에 오르다
그러나 선조는 듣지 아니하였다. 죽을 고생을 하고 따라온 늙은이를 파직한다는 것은 보통 인정으로도 못할 일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튿날 서인 대관 유홍 윤근수尹根壽, 최흥원崔興源 등 당파싸움을 일삼는 이들이 또다시 이산해를 탄핵했다. “나라를 그르친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선조는 서인들이 떠드는 바람에 부득이 이산해를 면직시키고 유성룡으로 영의정, 이양원으로 좌의정, 최흥원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실로 동인들은 이 논죄에 대하여 변명할 말이 없었다. 김성일의 말을 믿은 걸 죄라고 할 순 없지만 이웃나라의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책임은 이산해, 유성룡 등의 동인의 영수로선 과실이었다. 선조는 평소에 믿어오던 유성룡을 면직시키기 난처했지만 서인들의 변증 바른 앙탈을 막을 힘도 없었다. 그렇게 유성룡을 파면하고 이양원을 영의정에 삼았다가 다시 최흥원을 영의정, 윤두수를 좌의정, 유홍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유홍은 자기 집 식구는 북도로 피난을 시켜놓고 ‘왕이 한양을 버려선 안 된다’며 상소를 올린 장본인이었다. 이렇게 3정승의 자리는 서인의 몫이 됐다.
어쨌든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는 불과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주를 지켜서 한강 상류의 뱃길을 끊는 데 성공했다. 소서행장의 일본군은 3~4일이나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강원감사 유영길柳永吉이 원호를 강원도로 불러들인 것이다. 졸지에 강을 지킬 사람이 없어졌고, 일본군은 민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넜다. 그리고 양근읍楊根邑을 거쳐 한양을 향해 치고 올라갔다.
이때 부원수 신각은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군사는 오합지졸이라서 싸움이 시작되면 흩어질 우려가 적지 않소. 차라리 전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 배수진을 치면 적군과 사생을 결단하게 될 것이오. 일본군은 1000리 행군에 피곤한 군사요. 우리는 잘 자고 잘 먹은 군사일뿐더러 먼저 진을 치고 있을 것인즉, 객군인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오. 그런데도 한강을 앞에 두고 적군을 막으려 하면 적은 한강 저편에서 자리를 잡고 몇 날이든지 군사를 휴양하면서 우리 형세를 염탐할 것이오. 또 그동안에 강을 건널 꾀를 낼 것이니 나라를 위하여 한번 싸우는 바이면 강을 건너가 배수진으로써 자웅을 결하는 게 옳소.”
한양으로 치고 올라오는 소서행장
하지만 김명원은 위험한 일을 행할 위인이 아니다. 그는 신각의 헌책을 이렇게 반박했다. “적은 우리의 몇배나 되고 조총 같은 유리한 무기를 가졌으며 전쟁의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승승장구하여 천리행군을 풍우처럼 몰아오니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소. 또한 훈련이 부족한 우리 군사를 가지고 한강을 스스로 포기하고 일부러 강을 건너가서 배수진으로 수만의 적과 싸운다 함은 신립의 전철을 다시 밟음과 다를 바 없소. 차라리 강을 굳게 지켜 적군으로 하여금 건너오지 못하게 하고 각 도의 원군을 기다려 전후로 협공하는 게 옳소.”
그런 태도를 본 신각은 김명원이 하잘것없는 줄 알고 한양으로 유도대장 이양원을 찾아갔다. 이양원에게 한번 싸워보자고 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각은 부원수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부하라고는 100명이 채 안 됐다. 그러나 유도대장인 이양원은 한양의 난민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적군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 벌써 동소문東小門으로 빠져나가 달아나버린 상태였다. 신각도 하는 수 없이 동소문으로 나가 양주楊州 방면으로 향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