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위드프랜즈 박사
아이들은 가출과 결석을 반복했다. 갑갑한 보호시설에서도 뛰쳐나왔다. 거리를 헤매다 ‘위드프랜즈(With Friends)’로 모였다. 그 아이들이 무대에 올랐다. 아픔을 호소하려는 게 아니다. 힐링을 노래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가슴을 매만져준 김형석(60) 위드프랜즈 박사를 만났다.

인생은 알 수 없다고 했던가. 김 박사는 현재 30명의 아들과 딸을 둔 ‘자식부자’가 됐다. 4인가족이 많은 요즘 시대엔 보기 드문 대가족이다. 그에게 자식이 많은 이유는 가정과 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모인 청소년단체 ‘위드프랜즈’를 책임지고 있어서다. 김 박사는 “나만큼 자식이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김 박사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건 2012년 여름부터다.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가출청소년을 모아 댄스연습실을 운영한다는 얘기를 들은 후 인생 항로를 스스로 바꿨다. 처음엔 3~4명이던 아이들이 20명 수준으로 늘었다. 재정이 어려워지자 김 박사는 교회의 예산을 지원했다. 김 박사는 아이들의 댄스모임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고, 청소년단체 등록을 추진했다. 위드 는 2012년 서울시 청소년단체로 등록됐다. 위드프랜즈를 건강한 공동체로 만들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마음의 상처를 매만지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오래 전 집을 가출했거나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다.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은 청소년보호시설 ‘쉼터’로 향했다. 방은 따뜻하고 먹을 것은 풍족했지만 지켜야 할 제약이 많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탓에 숨이 막혀 쉼터를 박차고 나오기 일쑤였다.
김 박사는 이런 아이들에게 규율이 아니라 자유를 주기로 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뭘까. 30명의 아이들의 입에서 ‘노래’ ‘춤’ ‘연기’가 나왔다.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것. 김 박사의 머릿속에 ‘뮤지컬’이 떠올랐다. 마침 아이들에게 댄스를 가르치던 교인이 뮤지컬 배우였다. 김 박사는 공연을 추진했다. 연습과정은 드라마틱했다. 공동체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수없이 싸움과 화해를 반복했다. 몇번의 갈등을 겪은 후 경기도 안산지역에서 길거리 공연을 가졌다. 반응이 뜨거웠다. 길을 지나가던 청소년들이 또래의 공연을 보면서 흥미를 보인 것이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자 아이들도 흥이 났다.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하면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김건희 더스쿠프 기자 kkh479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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