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누가 추억을 산다고 했던가
‘응답하라 복고’의 허와 실
업계의 요즘 관심사는 ‘복고’다. 패션업계와 유통업계는 복고 콘셉트가 대세다. 젊은 세대에겐 신선함을, 중년 세대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IT도 예외는 아니다. 아날로그 디자인을 접목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복고가 시장에서 반드시 통하는 건 아니다. 추억을 사지 않는 소비자도 수두룩하다.
# 농구선수 이상민의 열혈팬 성나정 역을 맡은 배우 고아라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빨간색 더플 코트(일명 떡볶이 코트)를 입고 등장했다. 여기에 빵모자와 도트 무늬 크로스백을 곁들였다. 1994년 패셔니스타를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다. 이 장면이 전파를 탄 후 각종 인터넷 게시판엔 그의 패션을 묻는 질문이 올라왔다. 고아라가 착용한 더플 코트와 크로스백 제품은 방송 이후 완판됐다.드라마 인기에서 알 수 있듯 복고 열풍은 산업 전반에 강한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 기업들은 복고를 콘셉트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맥도날드의 TV광고는 복고 브랜딩의 전형을 보여준다.
맥도날드는 올 6월과 7월 각각 ‘1955버거’와 ‘1988버거’를 새롭게 출시했다. 맥도날드의 최초 햄버거 출시 연도와 한국 오픈 연도를 브랜드 네임에 사용해 독특성을 발휘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복고 콘셉트가 반영된 또 하나의 카테고리는 운동화 브랜드다. 특히 나이키•리복•프로스펙스 같은 정통 스포츠 브랜드가 복고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나이키는 최근 운동화 ‘에어 포스원’의 출시 30년을 맞아 리뉴얼 버전인 ‘루나포스 원’을 론칭했다. 리복은 올 9월 러닝화 ‘GL-6000’의 오리지널 버전을 선보였는데 1985년 이미 출시됐던 것이었다. 새롭게 선보인 러닝화는 회색ㆍ남색 등 전통을 강조하는 컬러를 사용해 ‘복고 패션’을 부각했다. 프로스펙스는 브랜드 론칭 33주년을 기념해 ‘헤리티지 라인’을 새로 선보였다.
소비자 지갑 연 복고의 힘
1983년 출시했던 운동화를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제품이다. 1980년대 ‘국민 운동화’라 불릴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제품을 30년 만에 소비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나이키코리아 관계자는 “복고 바람은 전 세대에게 브랜드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복고 바람에 힘입어 20년 전 제품이 시장에 다시 출시됐다. 응답하라 신드롬을 이끈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등장한 복고제품이 인터넷몰에 등장해 화제가 된 것이다. 삐삐ㆍ다마고치ㆍPC통신ㆍ이스트백 등이 드라마에서 눈길을 끌면서 당시의 패션스타일과 놀이문화가 판매로 연결됐다.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에 따르면 지난해 9월 한달간 1990년대 유행했던 백팩 브랜드 ‘이스트백’ ‘존스포츠’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자주 보던 인기 만화책 ‘슬램덩크’도 드라마 방영과 함께 판매량이 증가했다. 인터파크도서에서 판매중인 ‘슬램덩크 완전판 프리미엄 1~24 세트’는 드라마가 방영된 지난해 7~9월의 매출이 직전 4~6월 매출 대비 9배나 증가했다.
뷰티업계도 복고 바람에 합류했다. 콜드크림과 같은 추억의 제품을 간판 상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천연화장품 브랜드 엘리샤코이는 콜드크림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허브 마사지 콜드크림’을 출시했다. 과거 엄마들의 필수 마사지 제품이었던 콜드크림에 클렌징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복고 문화는 외식업계에도 퍼졌다. CJ제일제당이 올 3월 선보인 추억의 분식집인 ‘제일분식’이 대표적이다. 7080세대를 겨냥한 제일분식은 어릴 적 남산이나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즐겨 먹었던 ‘남산N왕돈까스’를 출시해 복고 마케팅에 합류했다. 추억의 왕돈까스 맛을 그대로 재현해 인기를 끌었다. SPC그룹이 운영하는 파리바게뜨는 복고의 인기를 바탕으로 옛날 스타일의 ‘옛날옛날 콩떡빙수’를 출시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복고는 포화상태에 다다른 통닭시장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수원 재래시장에 위치한 용성통닭은 옛날식 통닭을 튀겨낸다. 하루 1.2㎏짜리 통닭을 무려 500~600마리를 판매할 정도로 인기다. 최근엔 2호점까지 오픈했다.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난립하는 치킨시장에서 즉석으로 도계해 튀긴 재래시장 통닭이 소비자에게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간 것이다.
공연예매사이트에선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연말 개최될 조용필 서울 콘서트의 티켓 예매율은 올 11월 기준으로 20대(29%)가 50대(15%)보다 2배 가량 더 높다. ‘헬로’ 음반 발매 당시 후배가수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이 젊은 세대에게로 확대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복고가 세대 간의 교감을 몰고 온 것이다.
업계는 복고의 인기를 ‘과거에 즐겼던 문화의 흔적을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과거의 흔적을 통해 잊어버린 추억과 꿈을 반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고는 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일까. 여기엔 경기침체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소비자에게 새로운 경험 제공해야
삼성패션연구소는 지난해 1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사회 전반에 부는 복고 바람을 이렇게 진단했다. “지난해(2011) 예상과 달리 계속된 불황과 변화된 소비문화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복고와 스스로 위안을 찾고자 하는 힐링이 화두로 떠올랐다.” 경제적 불안감은 개인에게 긴장감과 피로감을 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편안하고 안락했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해소하는 것이 복고이고, 이것을 소비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복고가 시장에서 반드시 통하는 건 아니다. 복고를 단편적인 마케팅 관점에서 해석하면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지도, 관심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LG전자가 올 8월 선보인 ‘클래식TV’는 LED타입의 고해상도를 갖춘 브라운관TV다. 눈에 띄는 것은 디자인인데, 과거 브라운관TV에 쓰였던 로터리 방식의 채널 다이얼과 우드프레임이 적용됐다.
LG전자 측은 공식적인 클래식TV 생산량과 판매량은 밝히지 않았다. LG전자는 관계자는 “클래식TV는 애초에 1인가구나 독특한 콘셉트의 디자인을 좋아하는 소수의 계층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수익성을 겨냥한 제품은 아니다”며 “LG전자의 브랜드를 제고한다는 측면에서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LG전자의 기대와 달리 클래식TV는 쓴소리를 듣고 있다. 「월간 디자인」 10월호는 전문가들의 리뷰를 통해 클래식TV를 이렇게 평가했다. “꼭 복고적이어야 복고적인 것인가. 기능은 차치하고서라도 발상이 아쉽다. 소비자는 새로운 경험을 원한다.” 복고의 유행에 편승한 진부한 기획은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도, 지갑을 열 수도 없다는 얘기다.
김정숙 영남대(의류패션학) 교수는 “복고 디자인을 선보인다고 해서 복고 마케팅이 되는 것은 아니다”며 “과거의 추억과 감성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