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아이가 붓을 들었다
손보미의 Art & Dream
깜찍한 사이즈의 컵케이크를 입에 쏙하고 넣으면 달달한 향과 맛이 한 가득 퍼져 누구든지 금세 행복해질 것만 같다. 마침 오늘 만나기로 한 안성민 작가의 생일이라 기념으로 컵케이크를 한 박스를 사 들고 뿌듯한 걸음을 옮긴다.
“하늘아, 파이어니어(개척자ㆍPioneer)는 자신의 순수성으로 새로운 영역을 처음으로 열어가는 사람이래. 그는 탐험가(Explorer)이기도 하지. 우리 하늘이도 자신만의 영역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멋진 개척자가 되기를(Pioneer is someone who is first to move to an area. He is also an explorer.) 사랑해 하늘이, 엄마가.”
이제 갓 유치원을 다니는 딸의 도시락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정성스런 편지. 여기엔 매일같이 그림과 함께 한국어와 영어 메시지가 빼곡하다. 하늘이는 이 작은 도시락을 통해 그림과 글, 언어를 배워가며 자신의 세상을 차곡차곡 조금씩 쌓아가겠지?
동양화를 전공한 안성민 작가. 그녀는 지금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유머러스한 남편과 이쁜 딸 ‘하늘이’와 함께 살고 있다. 서울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메릴랜드 미술대학원 Mary land Institute College of Art에 유학차 뉴욕에 왔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정착한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처음으로 ‘모란의 초상’이라는 그녀의 작품을 봤을 때, 우아하게 묶인 모란꽃의 부케는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은은하면서도 단아하고 따뜻한 느낌이 필자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란꽃과 잎들을 재구성해 현대적 부케를 만들기도 하고, 모란꽃 하나를 과장된 크기로 확대해 단순화ㆍ반복화한 미니멀리즘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했다. 부귀영화라는 지극히 대중적이고 기복적인 상징성을 지닌 민화의 대표적 주제의 하나인 모란도를 재구성해 현대적 부케로 재탄생시킨 작품이었다.
뉴요커의 눈에 비친 민화
결혼을 앞둔 모든 여성이 부케 앞에서 인생을 돌아보듯 모란의 초상은 곧 작가 자신의 초상으로서 삶의 경험과 감정들과 기억, 상처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승화인 인생 여정을 돌아보게 한다. 인생의 시계를 되돌려 사색하게 하고 그것이 오늘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작품.
그녀의 작품 중 ‘모란의 초상’ 이외의 정말 인상적인 것은 디저트 시리즈. 아이스크림과 컵케이크 등의 디저트 시리즈는 아이를 키우면서 발전시킨 작품이라고 했다. 딸 하늘이가 아주 좋아할 것 같은 예쁘고 달콤해 보이는 디저트 시리즈.
어찌 보면 일상의 소소한 ‘사물’인 디저트를 한국적 패턴과 과감한 보색의 배치 등 민화적이고 전통적인 표현 기법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한국의 전통 종이에 수십번이고 붓끝을 고심하며 터치한 듯 섬세하고도 투명하게 그려진 마카롱을 보고 있자면 신사임당의 민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작은 것, 단순한 것, 고민을 잊게 하는 것, 순수하게 좋은 것 그래서 지금 ‘순간’을 즐겁게 하는 것…. 이것들이 아이를 통해,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배운 가볍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화폭에 담은 것이기도 하고요. 아이를 키우며 배운 인생의 교훈을 또한 작품에 순수하게 담아 보려 노력합니다.”
안성민 작가의 최근 작품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다.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스스로와 대화하는 듯한 ‘회귀’의 작품들이라고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뉴욕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지 10여년. 그간 치열했던 삶에서 사실 미니멀적이고 개념적인 설치 작업을 했었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 다시 전통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 민화에 빠져,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전통 팝아트를 그리고자 노력한다고. 그녀의 전통미술에 대한 애정과, 뉴요커의 감각, 그리고 엄마의 감수성이 함께 어우러진 작품세계에 필자는 푹 빠졌다.
지난 10년을 문화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으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가고, 아트페어를 돌았지만, 사실 필자는 작품을 판단하기에 안목이나 식견은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어떤 작품에 비평을 가미하기보다는 우선 작가와 함께 공감하고 싶어서 작품을 한 동안 멍하게 보는 습관이 있다.
안성민 작가의 ‘모란의 초상’에서 부케에서 잘려나간 부분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은은하고 아름다운 꽃다발 속 잘라져버린 한 조각으로 인해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슴속에 묻어둔 아련한 추억일까, 아니면 들춰내고 싶지 않은 상처일까.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내 짧은 인생의 어느 찰나일까.
‘디저트 시리즈’를 멍하니 보면서는 배시시 웃는다. 이런 귀여운 작품과 작지만 센스있는 디테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온갖 화려함과 물질이 가득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런 달콤하고 간결한 그림은 ‘순수성’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일까.
이제는 사라진 ‘아이’ 때의 순수성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떻게 어른이 돼서도 이를 유지하느냐다(All children are artists. The problem is how to remain an artist once he grows upㆍ파블로 피카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조금씩 내가 닳고 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때 나였던 ‘그 아이’가 내 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 같아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땐, 너무 앞으로 달려가기보단 중간 중간 멈춰서 내 속의 ‘아이’가 잘 있는지 한 번씩 살펴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안성민 작가의 예술이 말하는 메시지는 내 속의 그 ‘아이’와 함께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때론 조금 천천히, 가끔은 천진난만하게 순수성을 음미해보는 시간을 갖으라는 건 아닐까. 그럴 수 있다면 지금의 뉴욕의 따뜻한 가을 햇살처럼, 조금 더 따뜻한 가을, 따뜻한 삶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손보미 ProjectAA* Asian Arts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