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종이의자 300㎏ 버티다

종이의 팔색조 변신

2013-11-25     김건희 기자

세계의 발명품 ‘종이’. 스마트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이의 위상은 상당히 추락했다. 스마트 기기가 종이를 대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이의 가치는 여전히 대단하다. 예술적 가치를 넘어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자원’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다. 종이의 무한변신을 살펴봤다.

7살 딸이 있는 이은미(42ㆍ가명)씨는 올 봄에 이색전시회를 다녀왔다. 종이로 놀이터를 만든 전시회 ‘놀이발자국’이었다. 올 연말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는 말 그대로 종이로 놀이터를 재연한 것이다. 미로ㆍ미끄럼틀은 물론 정류장ㆍ하우스까지 모두 종이로 만들었다.

이씨는 당초 우려했던 것과 달리 종이놀이터의 강한 내구성에 만족했다. 어린이가 종이미끄럼틀을 오르내려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얇고 가벼운 줄만 알았던 종이가 그렇게 단단한지 처음 알았다”며 “종이의 내구성을 활용한 상자만으로 입체놀이터가 완성됐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스마트 시대의 최대 피해자 ‘종이’가 팔색조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예술작품과 대체자원으로서 그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 종이의 의미 있는 변신이 시작되고 있다는 얘기다.

가구에서 자원까지 종이의 무한 변신

젊은 디자이너들이 의기투합해 2007년 설립한 디자인연구소 ‘퍼니페이퍼’에는 다른 디자인업체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게 있다. 종이로 가구를 만든 ‘페이퍼팝(종이가구)’이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골판지로 만든 버섯모양의 스툴(의자)ㆍ좌식테이블ㆍ책꽂이ㆍ책상ㆍ플레이하우스ㆍ미끄럼틀 등이다. 마치 동화 속 세상에 온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제품의 강도다. 합판처럼 단단한 골판지와 지관을 활용해 구조물과 가구를 제작하는데, 어린이가 앉아서 움직여도 별 탈이 없을 정도로 내구성이 강하다. 특히 의자의 경우 300㎏가량의 무게를 버틸 수 있다. 한국생활안전연구원(KEMTI)의 안전검사기준인 80㎏보다 훨씬 내구성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내부는 비어 있어 무게는 매우 가볍다. 이동과 조립은 당연히 쉽다.

종이가구의 내구성이 강한 이유는 이중양면골판지를 사용해서다. 이중양면골판지는 양면 골판지에 편면골판지를 붙인 것이다. 편면골판지 2매와 라이너를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완충기능이 우수하다.

종이가구의 또 다른 장점은 100%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찢어지고 낡은 종이가구는 다시 활용이 가능한 재생종이로 탄생한다. 환경친화적이라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전시회 ‘놀이발자국’을 기획한 뉴블럭 관계자는 “전시회에 사용된 골판지는 1~1.5㎝ 두께의 특수강화골판지로, 목재만큼 두껍고 튼튼해 내구성이 좋다”며 “특히 골판지의 85%는 재생종이로 만들어져 환경친화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이의 활용 가치를 한껏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여러 겹의 골판지를 부착할 때 화학약품이 아닌 옥수수 전분을 활용하는 것도 눈길을 끌기 충분하다. 가위나 칼 혹은 풀이나 접착제 없이 조립할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가구를 구성하는 모든 조각은 홈에 끼우는 구조로 연결된다. 이런 작업을 통해 공간 지각력과 구조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다.

종이는 상품을 넘어 예술적 가치도 뽐내고 있다. 대표적인 게 ‘페이퍼아트(종이공예)’다. 종이재료를 이용해 창의성 있는 아이디어를 덧붙여 만들어낸 예술작품이다.

페이퍼아트의 가치를 일치감치 알아본 브랜드가 있다. 글로벌 브랜드 ‘샤넬’이다. 2011년 샤넬은 향수 브랜드 코코 마드모아젤의 프로모션 팝업 홍보물로 ‘종이’를 선택했다. 당시 샤넬이 광고영상을 종이로 재연하길 원한다는 얘기를 들은 패션 매거진 ‘나일론’은 북아트작가 김수현에게 샤넬과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의뢰했다.

김수현 작가는 향수의 은은함과 달콤함을 표현하기 위해 모델 키라 나이틀리의 장면을 폴라로이드 사진에 담아 팝업이 펼쳐질 때 빠르게 날리도록 했다. 패션업계에서는 유례없는 광고 콘셉트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종이 특유의 질감이 향수의 감성과 맞아떨어지면서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이 작품은 다시 한번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올 3~5월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팝업아트전’에서다. 종이를 이용한 입체조형 아트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샤넬의 전시뿐만 아니라 전시회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종이접기 수준을 뛰어넘는다. 가위로 종이를 오려 작품을 만들거나 오래된 책ㆍ서류ㆍ신문을 잘라 패턴을 완성하는데, 레이스천을 짜듯 고도의 정교함과 집중력을 요한다. 이런 이유로 업계에서는 페이퍼아트를 ‘속도가 느린 예술’이라고 부른
다.

스마트 기기가 대체 못하는 종이 가치

올 10월 종이박물관에서도 종이의 예술적 가치를 보여준 전시가 마련됐다. 전시회 ‘조잉, 새로운 의미와 소통’에서다. 파지를 작품의 재료로 이용한 작품이 전시기간 내내 주목을 받았다. 종이만이 낼 수 있는 정교함 질감과 느낌이 확연히 드러났음은 물론이다.

한국종이접기협회 관계자는 “최근 전시에 등장한 종이는 예술 재료로 쓰일 때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며 “단순히 오래됐다는 이유 말고도 종이 자체가 주는 감흥은 예술적으로 굉장하다”고 평가했다.

예술성을 겸비한 종이는 이제 새로운 자원으로 개발되고 있다. 2009년 스페인 카탈루냐 대학 ETSEIAT 화학공학부 연구진은 제지 슬러지에 생명공학적인 처리과정을 적용했다. 그 결과, 새로운 재료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재료란 플라스틱 포장 재료와 건축 자재를 대체하는 것이다. 새롭게 특허를 취득한 이 재료는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밀도가 낮고 금형 제작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에 타지 않는 내화성과 내구성을 갖췄다. 연구진은 이 재료를 활용해 산업과 제조분야에서 환경친화도가 낮은 재료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마트 시대가 도래한 지 5년.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일상생활에 편입되면서 종이의 입지는 상당히 좁아졌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종이의 무한 변신은 종이가 기로에 섰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배경이 어찌됐든 종이의 최근 변신은 의미있다. 스마트 기기가 대체할 수 없는 종이의 가치를 역설한 것이라서다.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빛난 것이다. 종이를 버리는 일이 새로운 건 아니라는 얘기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