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정보 지키려 재원 수백억 포기?
‘관세법 개정안’ 왜 뜨거운가
2013-11-09 김정덕 기자
“지난 13년(2000~2012년) 동안 개인과 법인을 통틀어 국내에서 조세피난처로 송금한 돈이 1조264억 달러(약 1091조원)에 달한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10월 15일 한국은행 자료를 토대로 부유층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거액의 돈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 의원이 지적한 1조264억원은 추경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3.2배에 달한다. 가장 낮은 소득세(6%)를 매겨도 연평균 5조원의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처럼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면 조세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곳간도 채울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재원마련방법으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꺼내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 기득권층, 다시 말해 부유층이 강하게 저항하기 일쑤라서다. 올해 5월 14일 강길부 새누리당이 대표발의한 ‘관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 해외여행자들이 과세품목(품목당 400달러 이상)을 구매해 반입할 때 관세청장이 관세를 원활하게 부과ㆍ징수할 수 있도록 자료제출기관의 대상을 명확히 하고, 자료를 월별로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정안은 자료제출기관의 대상을 ‘국가기관ㆍ지방자치단체 등 관계기관’에서 ‘신용카드 등의 발행업자와 여신전문금융업협회(여전협) 등 관계기관이나 단체’로 구체화했다. ‘신용카드 등을 해외에서 사용해 구입한 물품구매 내역을 월별로 제출받는’ 조항도 추가했다. ‘해외여행 중 물품구매에 많은 돈을 사용하는 여행자들의 신용카드 내역을 신용카드 발행사나 여전협 등으로부터 매월 제출받아 그중 과세대상이 있는지를 조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관세청에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손성수 관세청(외환조사과) 과장은 “조사목적으로 매년 고액 신용카드 사용자들의 내역을 받고 있지만 1년 혹은 1년 반 동안은 범법행위가 있어도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어 시의적절한 과세조치가 이뤄지지 못한다”며 “하지만 월별로 정보를 받으면 추후의 범법행위를 막고 과세도 제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개정안의 취지는 ‘숨은 세원稅源을 찾아내 세금을 효과적으로 걷겠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하경제 양성화와 잘 어울린다. 해외에서 돈을 펑펑 쓰는 부유층이 대상이라는 점에선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소관 상임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에서 수개월 째 낮잠을 자고 있다.
왜일까. 익명을 원한 기재위 소속 의원실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해당 의원은 이 개정안에 반대입장을 밝혔다.
개인정보침해냐 조세정의냐
“자료 제출 대상을 명확히 규정하고 강제조항을 넣는 등 관세청이 과세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받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취지는 공감한다. 그러나 정보를 월별로 제공받겠다고 한 것은 좀 다르다. 1년 단위로 고액 신용카드 사용자의 이용 내역을 신용카드 발행사나 여전협으로부터 받고 있다. 1년이 지난다고 해서 기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월별 과세를 한다고 해서 세액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법안의 실효성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도 월별로 자료를 받겠다는 건 정부가 개인정보를 과하게 침해한다는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언뜻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리지만 빈틈이 있다. 관세청을 수출입자료나 외환송금내역을 받는다. 모두 개인정보다. 그렇다고 이를 개인정보 침해라고 보긴 어렵다. 이 자료는 담당자 외엔 열람을 할 수 없어서다. 더구나 업무와 관련 없는 사람이 정보에 접근하거나 외부에 유출하면 관련 규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개정안이 개인정보를 침해할 수 있다’는 기재위의 주장이 기우에 불과한 까닭이다.
또 다른 빈틈도 있다. 관세청이 생각하는 ‘고액’이란 ‘해외여행자가 연간 2만 달러(2012년부터 1만 달러) 이상 신용카드를 사용했을 때’를 의미한다. 2011년 기준으로 해외에서 2만 달러 이상 신용카드를 사용한 이들은 6만3727명이었다. 전체 사용자(1736만8000명)의 0.38%에 불과하다. 2012년부터는 범위를 넓혀 1만 달러 이상 사용자를 집계했는데, 사용자는 17만4509명으로 전체의 0.47%에 그쳤다. 해외에서 돈을 많이 쓰는 소수를 대상으로 월별 해외카드사용액을 집계하겠다는 데 ‘개인정보 침해’를 운운하는 건 심하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손성수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관세청이 신용카드 발행사나 여전협에 요구하려는 신용카드 사용내역은 현금서비스와 일반소매 분야에 국한돼 있다. 음식점이나 호텔, 학교나 병원, 통신판매나 교통비용 등에 사용된 내역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전체 여행자의 1%도 채 되지 않는 선에서 현금서비스와 물품구매에 관한 자료만 받는다는 거다.” 과세 효율을 높이겠다는 관세청의 주장을 개인정보침해라는 이유로 반대할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고액’의 기준을 1만 달러에서 조금 더 낮춰 법안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행법상 구매물품이 400달러 이상이면 관세 부과물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손성수 과장은 “개정안에서 과세 정보의 구체적인 범위, 서식과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기획재정부령(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해놨기 때문에 아직 ‘고액’의 기준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햇다. 손 과장은 “원칙적으로 400달러 이상의 구매물품에 대해선 모두 과세 대상이 된다”며 “이 때문에 개인정보침해 논란만 없다면 정보제공 대상의 범위를 넓히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한 기재위 의원실 관계자는 “관세청이 매월 정보를 제공받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사생활이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에 과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보제공 대상 범위를 넓히는 것은 법안의 애초 취지와 맞다고 본다”며 “고액의 기준을 연간 3000~5000달러 수준까지 낮추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고액’ 기준 낮추는 것도 방법
충분히 합의 가능한 지점이 있다는 거다. ‘매월 정보제공’은 기준을 분기별 혹은 반기별 정도로 해서 1년보다는 짧게 조정하고, ‘고액’ 기준은 낮추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어서다. 남는 건 이 법안을 통해 얼마나 세수를 늘릴 수 있느냐다. 아쉽게도 이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손성수 과장은 “이 개정안을 통해 과세를 부과하려는 물품들이 휴대용 물품들이기 때문에 세수증대효과가 크지는 않고 수백억원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세수증대보다 조세정의 차원에서 본다면 의미가 있는 입법”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개인정보에 너무 접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과세기관에서 제대로 된 과세활동을 하기 위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정보제공을 원한다면 설득과 합의과정을 거칠만은 하다. 개인정보침해 못지 않게 조세정의실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관세법 일부법률개정안은 10월 28일 심판대에 다시 올라섰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juckys3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