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의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 ‘바스락’
소형가전제조업체 ‘크리스프’ 조영래 대표
일본 가전시장을 섭렵했다. 일본 산요와 손잡고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브랜드가 없었다. 일본 브랜드를 대신 팔아주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소형가전업체 ‘크리스프’를 이끄는 조영래 대표. 그는 그게 불만이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형가전브랜드 ‘크리스프’를 론칭한 이유다.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토종 브랜드. 하지만 울림은 대기업 브랜드 못지않다.
1985년 조영래 대표는 크게 상심했다. 대우실업에서 가전제품 수출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내심 미국 발령을 기대하고 있었다.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뜻하지 않게 일본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일본어는 고사하고 대한해협을 건너 본 적도 없었다. 그로선 날벼락이었다.주위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구동성으로 ‘일본 발령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자왕국인 일본에서 배울 게 많을 것’이라며 어깨를 토닥거리는 이도 있었다. 조영래 대표는 마음을 추슬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보자. 일본 가전시장을 섭렵하고 돌아오자.”
일본 도쿄東京로 날아갔다. 당장 언어가 속을 썩였다. 어쩔 수 없이 기를 쓰고 일본인을 만났다. 3개월 만에 일본어가 들렸고, 반년이 흐른 후엔 ‘농’ 정도는 가볍게 칠 수준이 됐다. 일본어로 영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그렇지 않았다.
언어가 된다고 물건을 맘대로 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주변에서 “일본어도 못하는 사람을 여기에 보내면 어떡하느냐”는 불만이 나왔다. 조급해졌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영업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일본인을 실제로 만나보니 맞는 말이었다. 제아무리 제품이 뛰어나도 영업사원의 마인드와 성품이 좋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보호기질’에서 기인한다. 한번 관계를 맺으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일본인 특성 때문에 영업을 하기가 어려웠던 거다.
조 대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진심을 담아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거였다. 일명 ‘감동영업’이다. 그러나 일본인 중 상당수는 그의 영업방식을 부담스러워했다. 이번에도 ‘보호기질’ 때문이었다. 기존 거래처와 관계를 끊을 수 없는 탓에 그의 영업방식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진심은 언젠가 통할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의 감동영업은 서서히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대우실업이 대우전자의 TV를 일본에 공급하기 위해 거래처를 확보할 때였다. TV를 공급하려면 먼저 전기기업을 뚫어야 했다. 조 대표는 일본전기기업인 NEC 관계자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갔다. 미팅이 거절되기 일쑤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진심을 담아 대우전자의 TV를 설명했다. 그렇게 수일이 흘렀다. NEC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계약을 체결하자는 내용이었다. 그의 감동영업이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대우실업은 이 계약을 발판으로 TVㆍ오디오ㆍ세탁기ㆍ냉장고ㆍVCR를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일본 가전시장에서 ‘1위’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제아무리 경쟁력 있는 제품이라도 인간의 벽을 뚫기 어렵다는 전자왕국 일본에 깃발을 꽂는데, 그가 큰 힘을 준 것이다.
감동 영업으로 日 전자왕국 정복일본에서 공을 세운 조 대표는 1991년 회사를 나왔다. 이유가 있었다. 무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회가 왔는데, 일본 무역회사 ‘크라운’이었다. 조 대표는 3년6개월가량 크라운한국 대표를 지냈다.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CEO 자리. 조 대표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번엔 창업을 결심했다. 일본제품을 한국시장에 내다팔 궁리를 한 것이다. 오랜 시장조사 끝에 파트너로 ‘산요’를 택했다. 산요는 당시 소니•파나소닉과 함께 떠오르는 일본 가전업체 중 한곳이었다. 1995년 한국에 삼양가전유통을 차렸다. 산요제품을 국내에 공급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전국 40곳엔 AS센터를 세웠다. 모든 게 술술 풀렸다. 이번에도 ‘성공’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터졌다. 1997년 외환위기였다.
당장 800원이던 환율이 몇 개월 만에 2000원으로 치솟았다. 조 대표에겐 직격탄이었다. 물건값이 2~3배 올랐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시장이었다. 수많은 직장인이 거리에 내몰리면서 시장이 위축됐다. 결국 2~3배 비싸게 들여온 물건을 반값에 팔아야 할 지경에 몰렸다. 악순환이었다.
조 대표에게 찾아온 첫번째 위기. 그는 눈물을 머금고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측근까지 잘라내야 했다. 혼자 남은 그는 직접 수금을 챙기고 재고를 들고 거리에 나갔다. 그렇게 반년을 버텼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오래 버티느냐가 승부의 관건이다.” 그랬다.
위기를 버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9 9년 일본을 대표하는 캐릭터 ‘헬로키티’를 만든 일본기업 산리오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산리오는 헬로키티 캐릭터가 새겨진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만들었고, 조 대표는 이를 한국시장에 팔았다.
캐릭터 키티를 앞세운 가전제품은 꽤 인기를 끌었다. 1000여대 가전제품이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하지만 이 역시 잠시뿐이었다. 실적이 올라가자 산리오측에서 높은 수수료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요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10년’에 빠지면서 산요가 적자를 면치 못한 것이다. 두번째 위기였다.
조 대표는 직원을 불러 모았다. “앞으로 산요와 산리오에 기대지 않겠다. 자체 브랜드를 만들겠다.”
주변 사람들마저 그를 뜯어말렸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브랜드를 론칭해도 한국시장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30년 무역상의 경험을 토대로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조 대표는 먼저 제품생산을 맡길 곳을 찾았다. 산요 OEM 공장을 일일이 찾아가 제품개발을 의뢰했다. 제품군은 오디오, 주방기기 등이었다. 첫째 상품으로 ‘포터블(CD카세트)’을 론칭하기로 했다. 2008년의 일이었다. 이제 남은 건 브랜드 이름이었다. CD카세트에 걸맞은 브랜드를 원한 조 대표는 소리와 연관되는 단어를 모조리 찾아봤다. 그러던 중 우연히 ‘크리스프(Crisp)’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바스락거린다’는 의미였다.
국내 소형가전시장 ‘지킴이’
첫째 상품인 크리스프 포터블이 나온 지 5년. 조 대표의 승부수는 시장에서 통했다. 크리스프 브랜드는 가전시장의 다크호스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4월 선보인 ‘크리스프 생선그릴’은 불티나게 팔렸다. 지금까지 12만대가 팔렸다.
하지만 조 대표의 평가는 냉정하다. 모든 제품이 시장에서 성공한 건 아니라서다. “지난해 출시한 생선그릴은 시장에서 성공했지만 2010년 선보인 아이폰 도킹(아이폰을 들을 수 있는 주변기기)은 고배를 마셨다.” 실패를 수차례 맛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생각에서다. “크리스프는 소형가전시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일은 삼성도, LG도 할 수 없다. 오로지 크리스프만이 할 수 있다.” 토종브랜드 크리스프는 소형가전시장의 신흥세력으로 거듭나고 있다. 조용한 발걸음이지만 울림은 대기업 못지않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kkh4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