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나우누리, 웰컴? 사오정세대
나우누리에 숨은 92학번의 자화상
1973년 소띠, 그리고 92학번(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이들에게 PC통신 나우누리는 ‘신세계’로 가는 통로였다. 그런 나우누리가 올 1월 폐쇄됐다. 나우누리에서 뛰어놀던 92학번은 침통하다. 40줄에 접어든 그들도 나우누리처럼 ‘밀려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하명훈(가명•40)씨에게 문자가 한통 와 있다.[하명훈씨는 가명처리 했지만 실존인물이다.] 지난해 8월까지 함께 근무하던 동기 윤형석(가명•40)씨가 생맥주집을 오픈했다는 내용이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한 뒤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겠다던 윤씨였다. 공부 대신 창업 쪽으로 방향을 튼 모양이다.
하씨와 윤씨는 마음이 잘 통했다. 힘들 때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20대를 회상하는 게 낙이었다. 며칠 전 통화하며 PC통신 ‘나우누리’의 폐쇄에 대해 함께 슬퍼하기도 했다. 이제 막 창업전선에 뛰어든 동기를 생각하니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다. 자신도 머지않아 자리를 내줘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씨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화장실 앞 거울에 선다. 번쩍거리는 창에 하씨의 얼굴이 반사돼 나타난다. 그 모습은 점차 20년 전의 그로 바뀐다.
가슴 설레던 PC통신의 추억
1990년대 대학은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이념논쟁’에서 ‘개인만족’으로 가치기준이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개인용 컴퓨터(PC) 시대가 열리며 과제용 리포트가 수작업에서 PC로 넘어갔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하씨는 또래보다 컴퓨터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PC통신의 초기 이용자이기도 했다.
PC통신에서 그는 ‘테리우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지금이야 유치해서 잘 쓰지 않는 닉네임이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유저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에게 PC통신은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모니터 화면 속 사이버 공간에는 새로운 친구, 새로운 모임, 그리고 새로운 자료들이 넘쳐났다. 컴퓨터에 앉아 ‘삐~’하는 모뎀접속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씨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1984년 데이콤(현 LG유플러스)에서 천리안를 통해 전자사서함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PC통신의 모체다. 천리안과 쌍벽을 이루던 하이텔은 1991년 12월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산하 PC통신 서비스 업체로 출발했다. 1994년 나우콤은 ‘나우누리’를 개설하며 PC통신 후발주자로 뛰어들었다. 원래 북네트(Book-Net)라는 이름의 책 전문 정보 서비스로 출발해 종합 PC통신 서비스로 확대했다. 나우누리는 최근까지 사이트를 유지하다 올 1월 31일부로 폐쇄됐다.
하씨가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했을 무렵, 세상은 또 변해 있었다. 전성기를 맞은 PC통신 옆에서 인터넷이 용틀임을 준비 중이었고, 더 이상 손으로 리포트를 작성하는 학생은 없었다.
복학생들이 대개 그렇듯 하씨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뒤처진 학과공부를 따라잡았고 취업을 위해 토익을 준비했다.
그런데 하씨가 취업준비에 한창이었던 1997년 날벼락이 떨어졌다. 외환위기였다. 그가 취업목표로 삼았던 K그룹은 경제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친구들은 휴학을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며 학생으로 남았다. 적籍 없이 실업자 되기가 두려웠던 탓이다. 하씨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가까스로 취직이 됐다. 그의 전공과는 무관한 중소 유통업체였다. 중소기업에 취업하자 하씨의 여자 친구는 실망했다. 하씨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일했다. 한국도 빠르게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경제적인 안정을 찾았다.
박봉이었던 하씨의 월급도 조금씩 올랐다. 그렇게 회사일에 재미를 붙일 때쯤 밀레니엄 2000년이 열렸
다. 화려했던 PC통신의 시대가 저물고 인터넷 세상이 활짝 열렸다. ‘닷컴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벤처’라는 타이틀만 걸면 무조건 돈이 된다며 투자자가 몰려들었다. 벤처기업의 요람으로 자리 잡은 테헤란로는 24시간 활력과 흥청거림이 뒤엉켰다.
그 무렵, 하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동기 장현우(가명)씨였다. 장씨는 하씨에게 PC통신을 전파한 컴퓨터 스승이었다. 장씨는 환경과 포털을 결합한 닷컴기업을 설립할 계획이라며 하씨의 동참여부를 물어왔다. 하씨는 고민했다. 유통일에 재미를 붙이긴 했으나 월급쟁이의 미래란 뻔한 것이었다. 자신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벤처기업의 유혹은 리스크가 큰 만큼 달콤했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당시, 환경과 벤처의 결합은 특이한 아이템에 속했다. 투자금이 몰려들었다.
하씨는 벤처기업에서 이사자리를 보장받았다. 일등 신랑감으로 떠오른 하씨에게 예쁜 아가씨들이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하씨는 여자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이사 명함을 받은 뒤 최고급 W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정도 꾸리고 사업도 탄탄대로이고, 하씨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벤처기업의 실질적인 수익창출능력에 의문이 제기되며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한껏 몰렸던 자금이 급속히 빠져나가면서 수많은 벤처업체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열풍이 최고조에 달했던 2001년 당시 벤처기업은 1만1392개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IT붕괴를 겪으며 2002년 8778개, 2003년 7702여개로 급격히 떨어졌다. 2년 만에 30% 이상 급감한 것이다.
하씨의 회사는 부도가 났다. 하씨는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니어서 금전적인 손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의 시간낭비에 대한 허탈감과 허공으로 날아간 일확천금의 꿈이 그를 괴롭혔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에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다행히 하씨는 일복이 있었다. 회사가 부도난 지 얼마 안 돼 재활용 전문 환경업체에 취직이 됐다. 회사에선 그의 전공과 환경벤처 경험을 인정해 줬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원래 성실한 사람인지라 곧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씨는 인생방향을 수정했다. 젊은 시절의 꿈이니 낭만이니 하는 건 걷어 차 버렸다. 이렇게 회사에서 인정받고 아이들 커나가는 데에 보람을 느끼며 살기로 했다. 대개의 한국 아빠들이 그러하듯이….
세월에 찌든 삶의 무게
하지만 하씨의 소박한 꿈도 위기를 맞고 있다. 2008년 리먼사태 이후 지속되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는
그의 회사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른바 ‘38선’ 정리해고 위기는 넘겼지만, 40대에 접어들면서 위아래로 압박이 심해졌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하씨의 호주머니에 진동이 온다. 부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다.
“어, 무슨 일이야?”
“여보, 기뻐해줘. 오늘 종신보험 계약 한 건 했거든. 이따 저녁이나 함께 해요.”
부인은 보험설계사다. 하씨 부부는 딸만 둘이다. 무용에 소질이 있는 큰딸은 발레 학원에 다닌다. 작은딸도 얼마 전 유치원에 들어갔다. 하씨의 벌이만으로는 아이들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어 부인도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오랜만에 부인과 단 둘이 저녁을 먹는 하씨. 가까이 마주하고 보니 부인의 얼굴에 잔주름이 많다. 마음이 아프지만 하씨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래,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연금 받으며 편히 살 날이 오겠지.’
식사를 마친 부인이 카운터로 향했다. 잠깐 틈을 타 하씨는 옆 테이블에 놓인 시사주간지를 펼쳤다.
갑자기 하씨의 마음이 답답해 온다. 잡지에는 ‘30년 뒤 국민연금 고갈’이라는 소제목이 인쇄돼 있었다.
유두진 기자 ydj123@thescoop.co.kr|@itvf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