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이 ‘혼자’라도 배는 산으로 간다
소니쇼크가 주는 교훈
소니는 한때 일본 IT업계의 자존심이었다. 국내기업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1980년대 소니 워크맨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었다. 소니는 CEO가 경영을 이끈다. CEO의 판단이 옳지 않으면 침체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룹 총수가 없으면 ‘아무 일도 진행하지 못하는’ 국내 기업에게 소니쇼크가 나타날 수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1946년 가을.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는 도쿄 시내 목조빌딩에 간판을 걸었다. 도쿄통신연구소. 일본 IT업계의 자존심 소니(SONY)의 전신이었다. 허름한 사무실엔 책상 두개가 덩그러니 놓였다.
글로벌 IT기업은 폐허 속에서도 싹을 틔웠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분명한 목표를 향해 뛸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부카는 모리타에게 말했다. “기술이 나라를 재건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말고 기술을 개발하자.”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상공장 건설’을 지향했다. 소니가 강조하는 가치였다.
섣부른 투자로 빚만 쌓여둘은 녹음기부터 만들기로 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물리학도였던 모리타는 가느라단 철사를 이용해 녹음기를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녹음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성능이 저조한 탓에 상품가치가 낮았다. 완벽한 실패였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기술 소화력과 노하우를 길렀다고 자위했다. 대신 연구개발(R&D) 전문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곤 ‘기술 R&D’를 사훈으로 정했다.
기술만은 자신있는 기업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소니가 ‘최초’라는 타이틀을 주요 경영 전략으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경영진은 투톱 체제로 구성했다. 이상주의자 이부카와 현실주의자 모리타의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부카가 꿈을 꾸면 모리타는 꿈을 실현하는 식이었다.
둘은 같은 사람인양 손발이 척척 맞았다. 당연히 사업성과는 훌륭했다. 소니는 1955년 배터리 전력을 이용한 포켓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출시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였다. 라디오 개발에 성공한 소니는 TV로 눈을 돌렸다. 오랜 연구 끝에 1968년 트리니트론 컬러TV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했다. 소니의 고공행진은 계속 이어졌다. 1979년 세계시장을 들썩이게 만든 워크맨이 나온 것이다. 소니를 단숨에 IT업계 1위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한방이었다. 소니 워크맨은 출시되자마자 30만개가 팔려나갔다.
창업자 이부카와 모리타의 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이부카의 아들 가로토는 이렇게 평가했다.
“두 사람은 연인보다 가까웠다.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할 만큼 친했다. 부인과 자식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였다.”
이부카와 모리타로부터 소니의 지휘봉을 물려받은 이는 오가 노리오 CEO였다. 그는 바리톤을 전공한 오페라 가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우연히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접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는 불만을 터뜨렸다. “카세트테이프의 녹음 성능이 형편없다. 특히 녹음기 음질은 최악이다.”
나름 유명했던 오페라 가수 오가의 불평을 소니 경영진은 흘려듣지 않았다. 1957년 오가가 성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나자 소니는 그를 지원했다. 해외거주 아르바이트생으로 특별 채용한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전자가전 선진국이었던 독일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이제 막 전자산업에 눈뜬 소니에게 독일은 선망의 국가이자 최전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가는 소니에게 최고의 테스트 시장이었다. 독일에서 공부한 오가는 예민한 귀와 세련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베를린대학을 졸업한 오가는 정식으로 소니에 입사했다. 이후 승승장구했다. 소니 창설 이래 가장 빨리 승진해 CEO 자리까지 올랐다. 1982년의 일이었다.
예상대로 오가는 영민했다. CEO에 오른 직후 CD를 넣는 워크맨을 출시했다. 경영자질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승부수이기도 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카세트테이프가 아닌 CD를 넣는 디지털 워크맨은 최첨단 테크놀로지였다. 소니 CD 워크맨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단숨에 음향시장을 바꿨다. 아날로그 방식 레코드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패러다임을 이끈 것이다.
눈부신 성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가의 잘못된 결정 하나가 소니를 패망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묻지마 투자’가 화를 불렀다. 1998년 소니는 일본 환율 기준으로 5000억엔(6조원) 프리미엄을 얹어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한편에선 과도한 투자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오가는 “콘텐트 확보가 필수”라며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영화사 인수 후 소니는 매년 수백억엔의 적자를 냈고, 성장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오가의 실책은 또 있다. 1994년 미국에 200억엔(2402억)을 들여 브라운관 TV공장을 건설한 것이다. 당시 TV시장은 벽걸이용(PDP) 평면패널로 전환되고 있었다. PDP는 기체를 방전할 때 생기는 플라즈마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해 그래픽을 만드는 기술이다. 당장 브라운관 TV가 잘 팔리는 데만 집중한 나머지 TV시장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묻지마 투자’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1991년 8000억엔에 달하던 잉여금이 3년만인 1994년 2700억엔까지 줄어들었다. 여윳돈이 확 줄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오가는 개의치 않았다. 되레 평소 관심을 뒀던 엔터테인먼트에 투자를 단행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그는 CBS레코드와 BMG에 돈을 쏟아 부었다. 소니의 위기가 시작됐다.
1995년 소니 이사진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오가보다 더 젊고 혁신적인 CEO를 임명했는데, 이데이 노부유키였다. 소니를 혁신적으로 바꿔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만든 인사였다.
소니의 수장이 된 이데이는 인터넷을 통한 콘텐트 허브를 만들었다. 소니의 모든 디바이스를 통해 콘텐트를 유통하겠다는 전략이었다. 1995년 인터넷 접속회사 소네트 설립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스카이 퍼펙트TV를 통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 진출도 마찬가지였다.
이데이의 경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취임 후 3년 만에 5200억엔에 이르는 흑자를 달성했다. 하지만 이데이는 미국식 경영의 신봉자였다. 컴퍼니제도를 도입하며 스피드 경영을 강조했다. 그 결과 소니의 모든 사업은 경쟁체제에 놓였다. 이 전략은 소니의 고유문화를 훼손했다. 창업자 아부카와 모리타가 강조한 이상공장 건설이 무너진 것이다.
시장 흐름 놓친 오가ㆍ이데이
2003년 터진 ‘리튬 이온배터리 폭발사건’은 이데이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미국 PC업체 Dellㆍ애플ㆍ레노버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던 소니의 신뢰성은 곤두박질쳤다. 소니의 배터리가 들어간 1000만대의 컴퓨터는 줄줄이 리콜되는 굴욕을 맛봤다. 이데이는 이 사건 이후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하워드 스트링어ㆍ히라이 가즈오가 CEO에 올랐지만 소니의 부활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소니의 침몰 원인은 여러 가지다. 기업문화 실종, 성과주의, 매출지상주의, 경쟁 근본주의 등이다. 가장 큰 원인은 자만심이었다. 옛 성과에 취해 글로벌 시장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CEO의 독단경영은 소니를 바다가 아닌 산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주목할 점은 소니의 CEO는 막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CEO가 결정하면 그게 옳든 그르든 사업은 진행됐다. CEO가 판단을 잘못하면 침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총수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있고, 총수가 없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 한국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니의 몰락이 국내기업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itvf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