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백성의 도탄을 구하려 순신이 나서는데

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6회 ①

2013-01-04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옥포 기타 싸움에서 손쉽게 승전한 장졸들은 벌써 교만하고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겼다. 적선을 만나기만 하면 곧 대번에 때려 부수고 그 배속에 있는 전리품을 앗아서 나눠 가질 생각에 어서 행선하여 싸우기만 재촉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순신은 자중하여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병선 군기 군사의 준비를 하였다. 준비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이것을 아는 이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뿐인 것 같았다.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서울 소식을 탐문한즉 선조가 무사히 평양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조금 마음을 놓고 새로이 병선과 군기를 정리하였다.

순신은 이번 옥포 기타 각처 싸움에 적의 병선 합 40여 척을 당파 분멸1)한 전말과 주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의 정황이 참혹하더라는 것과 의뢰할 곳 없는 백성들이 수군 함대를 보고 어떻게 기뻐하던 것과 그들을 다 완전한 지대로 옮겨오지 못한 것이 유감이란 말과 적의 병선에서 노획 몰수한 전리품이 다섯 창고에 넣고도 남은 말과 그 물건들이 사치하고도 흉측하다는 사실 상태를 세세히 기록하여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전리품 명목
- 식미 300여 석이며
- 의복, 목면 등 물품이 무수하며
- 붉은 갑옷, 검은 갑옷, 각색 철투구, 각렵2), 철가면 등이며
- 금관 금우3) 금종 우의4) 우추5) 나각6) 등 기이한 형상이 매우 사치스러우며 귀신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며
- 성을 깨는 기구로는 큰 쇠못, 동아줄 등이 극히 흉물스러웠으며
- 조총, 활과 화살 등 물품이 무수하였다. 입을 가리는 각렵
이상 노획한 전리품이 다섯 동의 창고에 재였는데 충만하였다.

옥포에서 시작하여 개전한 이래로 적선을 40여 척이나 당파 격침하였다. 적군의 죽은 자가 못 돼도 수천 즉 부지기수로되 이편의 군사는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순천 정병7) 이선지李先枝의 화살에 맞은 부상뿐이었다. 거북선과 대완구와 불랑기와 화전과 유엽전 장편전 및 강한 활, 날카로운 칼, 긴 창, 큰 도끼 등 군기의 위력 앞에 적의 조총 기타 군기가 아무 힘을 쓰지 못한 것이었다.

일본의 궁시는 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즉 고제도지만, 조선의 궁시는 고제도를 버리고 몽고식 호궁胡弓을 사용한 것이어서 훨씬 편리하고 정강한 무기로 개량된 것이었다.

원균의 군사는 전리품을 노획할 때에 그것을 빼앗기 때문에 순신의 군사를 두 명이나 활로 쏘아 맞혔다. 그래도 원균은 이것을 금하지 아니하였다.

원균으로 말하면 자기가 탄 전선까지도 순신의 준 바요, 수하에 오직 배 4척이 있을 뿐이었다. 전쟁 중에는 원균이 항상 적군의 탄환을 피하여 맨 뒤로 돌아다니다가 전리품을 빼앗을 때에는 가장 용감하여 다른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게 날뛰어서 피아를 분별치도 못한다. 비유컨대 남의 집 농사에 낫만 가지고 추수하려 대드는 셈이다. 순신의 부하 제장은 그 비열한 행동을 통분하게 여겨서 다 침을 뱉으며 욕하였다.

빼앗은 전리품 중에 백미 300여 석은 여러 병선에 양미로 나누어 주고, 의복과 목면 등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군사들의 싸우고 싶은 뜻을 돋우게 하였다.

붉은 철갑 검은 철갑이며 각색 철투구며 입을 가리는 각렵이며 붙이는 수염이며 철가면 금관 금우 금종 우의 우추 나각 등의 사치하고도 흉물스러운 것과 큰 쇠못이며 동아줄 등은 모두 감봉監封하여 창고 내에 보관하였다. 그중에 무겁지 아니한 물건을 첩서[전승하였다는 장계]를 가지고 가는 편에 조정에 올렸다.

금번 싸움에 도로 찾은 포로 중에 계집아이 하나는 동래부 동면 응암리鷹巖里에 사는 윤백련尹百連이라는데 나이는 14세였다. 그 아이가 말했다.

“나는 기장機張 고을 운봉산雲峯山에 숨어 피난하여 있다가 적병이 들어와서 나를 붙들어서 부산으로 잡혀가 배 밑에 갇혀 있었어요. 그렇게 가두어 임의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는 어느 날인지 몰라도 병선 30여 척을 타고 김해로 와서 상륙하여 노략질하다가 5~6일 후에 다시 배에 올라 거제 율포로 왔다가 그 이튿날 옥포로 와서 앞바다에 섰다가 싸움이 났어요. 내가 탄 배에 조선대포의 철환이 밥주발 같은 것이 날아와 떨어지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서 그놈들이 맞고는 피를 흘리고 거꾸러지는데 그러니깐 적군들이 견디지 못하여 무어라고 떠들고 울며 모두 물에 뛰어들어서 헤엄쳐서 산으로 달아나 버렸는데 나는 갑판 밑에 숨어서 그 밖에는 몰라요.”

순신은 백련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정경을 당한 아이가 백련이 하나만 아닌 것을 생각하니 순신의 가슴은 아팠다.

순신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 아이 말을 들은즉 이렇게 불쌍한 아이가 그 얼마인지 다들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물었다.

녹도만호 정운이 큰 소리로 “죽기로써 싸우려하오!” 하니 그 소리가 우레 같았다. 제장들도 정운의 말에 동감하여 모두들 “소인네도 다 그러하오. 우리는 다 우리 창생을 위하여 죽기로써 싸우기를 결심하였소!” 하였다.

순신은 제장더러 “공들의 성충보국하려는 마음이 이만하니 걱정 없소. 맹세코 영남 해상의 적들을 소탕합시다” 하고 순신은 제장에게 다시 나아가 싸우자는 뜻을 암시하였다. 그리고 윤백련 이외에 적에게 잡혀갔던 아이들을 순천 보성 등 각 수령에게 맡게 하여 잘 거두어 기르라고 분부하였다.

순신은 가덕 이서로 노량에 이르는 여러 고을, 즉 창원 웅천 거제 진해 칠원漆原 고성 사천泗川 진주 곤양 남해 등 여러 고을의 연안과 산골에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를 이끌며 난을 피하는 가련한 백성들의 모양을 보고, 더구나 싸움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는 너희들을 안전한 지대로 실어다 주마고 하고 그대로 이행하여 주지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일개 수사로서는 도와줄 관권이 없었으므로 일도의 도백인 전라감사 이광에게 통지하여 양미를 보내어 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지 말게 하기를 청하였다. 순신의 조정에 올린 승전한 장계 중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죽기도 많이 하고 노략 창탈도 많이 당하여 백성들의 살아남음이 적습니다. 이제 신이 연해로 돌아다녀 보니 지나는 산곡마다 피난하는 백성이 없는 곳이 없고, 한번 신 등의 주사만 보면 아이들이나 백발 된 늙은이들이나 업고 안고 서로 이끌고 울고 부르짖고 따라옴이 마치 살아날 길이나 만난 듯합니다. 어떤 이는 적의 종적을 가르쳐 주는 이도 있어 그 측은함이 차마 두고 가기 어려웠습니다. 곧 배에 태워 데리고 가고 싶으나 원래 그러한 백성이 많을뿐더러 병선에 백성을 많이 실어서 전쟁할 때에 불편이 있어 돌아오는 길에 데려갈 테니 각각 숨어 있으라고 달랬습니다. 그 뒤에 문득 들으니 성상이 한성을 버리시고 서관으로 몽진하셨단 놀라운 통기를 받고 급급히 돌아왔으니 그 애련한 정이 오히려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순신은 자기의 관할 내에 있는 돌산도8) 거문도9) 등지에 이 피난민들을 옮겨다가 농업 어업 목축 공업을 각기 그 기능을 따라 진흥시킬 계획을 세워 실시에 착수하고 유민을 받아들였다.

순신이 군사를 휴양하며 더 모집하고 병기를 정돈하는 동안에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적선이 여기 왔소 저기 왔소 하는 경보가 오고 와달라는 청병 관문이 왔다. 그러나 순신은 원균의 말을 다는 신용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전일에 임무를 같이 수행하는 동안에 원균은 거짓말이 많고 또 약속을 하여 놓고도 그 약속을 지킨 일이 한 번도 없음을 본 까닭이었다. 만일에 원균의 헛된 경보를 신용하고 군사를 경솔히 출동하였다가 말한 곳에 적선이 없으면 전군에 대한 대장의 위신이 떨어질 뿐 아니라 군국대사를 그르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또, 적선이 곤양까지 왔다 하오. 어서 행군합시다” 하고 정운 어영담 등 충용한 부하제장이 모여들어 간하며 순신을 재촉할 때에는 순신은 답하되 “이번에는 적괴 수길이 전날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필연코 대함대를 보낼 것 같으니 군을 경솔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또 전군에게도 경거망동은 신망을 잃는 것이오” 하고 원균의 단점은 말하지 아니하고 탐보선을 내놓아 정탐하기만 일삼았다.

과연 옥포 및 적진포 등 각처에서 패전한 소식을 들은 일본 명호옥에 있는 수길의 본영에서는 분이 나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이 패전의 수치와 원한을 갚고 또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제해권을 얻으려 하였다.

원래 수길의 계획인즉, 소서행장 가등청정 흑전장정 등 선봉으로 하여금 육로작전으로 한성 평양 함흥 경성을 공략하게 하고, 구귀가륭 등당고호 가등가명 협판안치 등 수군제장으로 하여금 전선 500여 척과 수군 10만을 거느리고 수로작전으로 경상 전라 충청 경기 황해 평안 제도의 연안을 공략하였다.

수륙병진으로 조선을 석권하고 명나라에 침입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수길의 제일차 수륙군원정의 계획이었고 끝까지 계속하자는 계획이던 것이었다.

그래서 육군은 예상하던 이상의 전과를 얻어서 정발 송상현 박진 이일 신립 김명원 등 제군을 쳐 파하고 무인지경같이 쳐들어와 한성 개성 평양과 함흥 경성을 뜻대로 점령하였으나 수군은 선봉 및 별동대가 옥포 적진포 등 각처에서 조선 수군의 명장 이순신의 솜씨에 부서지고 말았다. 이외의 사정으로 풍신수길의 계획은 적지 않게 어긋나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수륙 제장에 박홍 원균 이일 김명원의 무리는 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하였고, 정발 신립 박진 심우정의 무리는 적이 워낙 많은데다가 용감하되 지모가 부족하여 전사함으로써 보국하였고, 조헌 고경명高敬命 송상현의 무리는 의병을 일으켜 충의로써 분전하다가 죽음으로써 절개를 세웠고, 곽재우 정기룡 제말諸沫 김면金沔의 무리는 초야에서 일어나 의기에 기댔으나 형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이런 고로 일본 제장이 조선 팔도를 유린하다가 이공의 함대를 만나 연전연패하고서야 비로소 조선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니 수길이 분해서 말하기를 “일본은 수국水國이거늘 수전水戰이 이순신에 미치지 못하다니!” 하며 크게 탄식하였다.

풍신수길의 본영에서는 석전삼성 덕천가강의 무리 등이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수군을 전멸시켜 옥포 및 적진포에서 참패한 수치를 씻고 조선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준비하고, 부산에 있는 모리휘원과 한성에 있는 부전수가에게 전령하여 속히 수군 제장들로 하여금 이순신을 격멸하라고 하였다.

순신도 적의 정세를 상세히 탐지한 결과로 대강은 수길의 심산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신은 제장들에게 “이번에 오는 싸움은 결코 전번 싸움과는 달리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짐작하라” 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전일에 깨뜨린 적의 함대는 선봉대일 것이요, 이후에 오는 것은 정녕코 주력함대일 것이었다.

옥포 기타 싸움에서 손쉽게 승전한 장졸들은 주장의 고심한 제승방략은 알지 못하고 벌써 교만하고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서 적선을 만나기만 하면 곧 대번에 때려 부수고 그 배속에 있는 전리품을 앗아서 나누어 가질 생각에 어서 행선하여 싸우기만 재촉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순신은 자중하여 좀처럼 움직이지 아니하고 병선 군기 군사의 준비를 늘어지게 하려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준비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이것을 아는 이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뿐인 것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