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성 가볍게 버림에 선조가 몽진하고
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3회
선조는 호종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였다. 중로에서 어느 지방을 가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대사헌 윤두수가 말하였다. “북도는 군마가 정강하고 함흥과 경성이 다 천부지토이며 구석지고 하여서 족히 믿을 만하오니 함경도로 가십시오” 이때 이항복이 진언하였다. “평안도 의주로 가야 만일에 세궁역진하더라도 명나라에 의탁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이 탑전에 말하되 “여러 왕자를 각도로 분파하여 보내되 중신을 대동케 하여 근왕1)의 부대를 모으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선조는 그 말에 따라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 규珪를 강원도로 보내고 유성룡을 돌아보며 “경은 유도대장이 되어 한성을 지키게 하오” 하였다.
도승지 이항복이 말하기를 “좌상 유성룡으로 유도대장을 삼으심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서관으로 가신다면 압록강을 건너면 명나라 땅이니, 조정에 있는 대신 중에 이 일에 대처할 만한 재주와 자격을 품은 이는 명민하여 숙련되고 응대에 능한, 오직 유성룡 일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좌상으로 하여금 한성을 지키게 하면 종국에는 다만 패군지장이 될 뿐이나, 대가를 호종2)케 하면 반드시 크게 쓸 곳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는 이항복의 말을 좇아 우의정 이양원으로 유도대장을 삼고 좌의정 유성룡은 호종하게 하였다.
대궐을 호위해야 할 오영문3)의 금군도 거의 도망하여 버리고 소위 옥당이니 은대4)니 육조 삼사니 하는 축들도 거의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선조의 좌우는 점점 적막해 간다.
상주에서 패하여 충주로 달아나고, 충주에서도 탄금대 싸움에 패하여 신립 김여물 같은 충신들은 다 전사하였다. 허나 홀로 이일은 다 죽는 속에서 살 기회를 잘 보아 용하게도 살아나 도망을 해서 목숨을 보존하여 장계를 써 올려서 서울 한양에 그 장계가 들어왔다.
그 글에는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과 김여물의 모의가 서로 합치하지 못한 정세와 패전한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한 뒤에 적군이 금명일간에는 한성을 범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일의 장계를 보고는 군신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이제는 일각이라도 더 늦출 수 없다고 하여 선조는 창황중에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 혼琿과 제5왕자 신성군信城君 후珝와 제6왕자 정원군定遠君 부琈(후일 원종왕元宗王으로 추숭追崇하다)가 뒤를 따라 광화문을 나섰다.
밤은 사경이요 4월 그믐밤이었다.5) 밤비가 세차게 퍼부어 지척을 가리지 못하였다. 왕비 박씨는 상궁 두어 사람을 데리고 내전에서 인화문仁和門으로 나섰는데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로 인도하여 겨우 길을 찾았다. 궁녀들은 비를 맞으며 그 뒤를 따랐다. 서대문에 이르기까지 곡성이 진동하였다. 선조가 서대문을 나서는 때에는 따르는 신료가 영상 이산해 좌상 유성룡 이하로 백여인에 지나지 못하였다.
선조가 서울을 떠난 뒤에 유도대장 이양원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여 난민이 봉기하여 장예원掌隸院과 형조를 불사르고 다음에는 내탕고內蕩庫에 난입하여 재보를 끌어내고 경복궁景福宮ㆍ창덕궁昌德宮ㆍ창경궁昌慶宮을 불살랐다. 장예원은 공사노비의 문서 장부가 있는 곳이요, 형조는 귀족들이 평민 이하를 형벌하던 곳이다. 난민들은 적군이야 오거나 말거나 우선 이것부터 불살라 없앤다는 것이었다. 이 모양으로 혼돈상태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니 그 책임은 적다 할 수 없다.
선조는 호종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였다. 중로에서 어느 지방을 가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대사헌 윤두수는 “북도는 군마가 정강하고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이 다 천부지토6)이며 구석지고 하여서 족히 믿을 만하오니 함경도로 가십시오” 하고, 이항복은 진언하되 “평안도 의주로 가야 만일에 세궁역진7)하더라도 명나라에 의탁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주장이 없는 선조는 처음에는 윤두수의 말대로 할 뜻도 있었고 이항복의 말에도 그럴 듯 여겼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두 사람의 말을 다 불찬성하였다. 진언하되 “북도는 교통이 불편하니 적병이 만일 따라오는 날에는 더 갈 곳이 번호의 지역뿐이니 불가하고, 또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간다는 것은 성상이 일보라도 조선 땅을 떠난다 하면 조선은 벌써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 하였다.
선조는 “명나라에 의지하는 것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나의 뜻에 있었다”고 말했다. 신하들이 퇴출한 뒤에 유성룡이 이항복을 보고 “어찌하여 성상이 조선을 떠난다는 말을 입 밖에 낸단 말이오? 만일에 이 말이 전파되면 민심이 소동될 것이니 어찌 말을 경솔하게 하오?” 하고 책하였다. 이항복은 유성룡의 앞에서 “대감, 내 잘못하였소” 하고 깨끗하게 사과하였다.
선조의 대가가 임진강臨津江을 건너는데 비는 퍼붓고 어두워서 지척을 알 수가 없었다. 유성룡은 도승渡丞(나루터를 맡은 관원)의 관사에 불을 놓기로 명하였다.
이 오래 묵은 큰 집에 불이 붙어서 강의 북안까지 비추어서 거의 백주와 같았다. 참 묘한 계책이라고 모두가 칭찬하였다. 이것은 후일에 적군이 오더라도 뗏목을 만들 재목을 미리 없애 버린다는 것이었다.
파천播遷의 길에 오르다
경기감사 권징權徵은 군사 수십명을 데리고 따라왔다. 동파역東坡驛에 다다르니 파주坡州목사 허진許晋, 장단長端부사 구효연具孝淵 등이 지대원8)으로 와서 음식물을 가져왔는데 시위하는 의장병儀仗兵들이 기갈이 심한 끝에 음식을 보고 예의염치를 잊어버리고 난잡한 행동이 무쌍하였다. 선조의 근시에 있는 대신은 그 음식을 먹지도 못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선조는 언덕위에 올라 임진강 저쪽의 산협인가를 바라보고 그 창황분주한 중에도 불구하고 시신더러 “성혼成渾의 사저가 어느 집이냐?”고 물었다. 난시가 되었으니 훌륭한 장수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지만, 그러기도 전에 한학자 선생님을 물으신 것이 평소에 문文을 숭상하던 습관이었다. 시신들은 저쪽 산변에 있는 성혼의 주택을 가리켰다. 선조는 “성혼은 어디 가고 나와 맞이하지를 않느냐?”고 하였다. 시신들은 “심곡에 거한즉 거리가 멀어 미처 나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고 변호하여 말하였다. 성혼은 우계선생牛溪先生이라고 하는 한학자였다.
황해감사 조인득趙仁得이 본도 병마 수백기를 거느리고 마중을 왔는데 서흥瑞興부사 남억南嶷이 군사 200명과 말 50필을 가지고 먼저 왔다. 선조의 일행은 나누어 타게 되었다. 선조의 거마는 개성開城에 도착하였다.9)
도망하지 아니하고 선조를 따라왔던 몇몇 대관이라는 무리들이 기세 당당하게 영의정 이산해를 탄핵하였다. 이유는 수상이 되어 국정을 잘못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외란을 불러일으켜 성상이 몽진의 고초를 당하였다는 것이다. 서인들은 개성 백성을 선동하며 이용하여 선조에게 이산해를 탄핵 상주하여 나라를 그릇되게 한 신하로 몰아댔다. 서인들은 서울서 개성까지 오는 동안에 배 고프고 다리 아픈 책임을 수상 이산해라는 동인 늙은이에게 덮어씌우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산해보다도 좌의정 유성룡을 더 미워하였지만 한꺼번에 둘을 치는 것은 전술상 불리한 줄을 알기 때문에 우선 이산해만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듣지 아니하였다. 죽을 고생을 하고 따라온 늙은이를 파직한다는 것은 보통 인정으로도 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튿날 서인 대관 유홍 윤근수尹根壽 최흥원崔興源 등 당파싸움에는 제일 선수들인 몇몇이 또 이산해를 탄핵하되 나라를 그르친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서인들이 떠드는 바람에 부득이 이산해를 면직시키고 유성룡으로 영의정, 이양원으로 좌의정, 최흥원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그러나 유성룡이 수상의 자리에 앉은 것은 서인들에게는 더욱 견디지 못할 일이라 하여 또 유성룡을 탄핵하였다. 이유는 전년에 일본에 갔던 사신 황윤길과 김성일 두 사람 중에 서인인 황윤길은 수길이 반드시 조선을 침범하리라고 보고하였은즉 만일에 그 말대로 군비를 정돈하였던들 오늘날 이리 되었을 리가 있느냐, 그런데 동인인 김성일이 보고를 잘못하여 일본의 침범이 없으리라고 말한 것을 이산해 유성룡 등 일파들이 제 당파를 위하는 심리로써 김성일의 착오된 의견을 편들어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파를 짓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성토 죄명으로 이산해를 탄핵한 유성룡도 면치 못할 것이라 하여 또 떠들고 일어나서 새로 난 수상 유성룡을 탄핵하였다. 실로 동인들은 이 논죄에 대하여 변명할 말이 없었다.
김성일의 말을 믿은 것은 죄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웃나라의 정세를 밝게 보지 못한 책임은 이산해 유성룡 등의 동인의 영수로서는 면할 수 없는 과실이었다. 선조는 평소에 믿어오던 유성룡을 면직시키기가 난처하였으나 서인들의 변증 바른 앙탈을 막을 힘도 없었다. 또 유성룡을 파면하고 이양원을 영의정에 삼았다가 다시 최흥원을 영의정, 윤두수를 좌의정, 유홍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유홍은 상소를 올려 서울을 버린다는 것을 크게 반대하면서 자기 집 식구를 북도로 피난시킨 위인이었다. 삼정승의 자리는 서인이 전부 차지하였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는 불과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주를 지켜서 한강 상류의 뱃길을 끊었더니 소서의 일본군이 삼사일이나 강을 건너지 못 하였다.10)
그러나 강원감사 유영길柳永吉이 원호를 불러 강원도로 돌아갔다. 그 뒤에는 강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 적군은 민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떼배를 모아 타고 강을 건너서 양근읍楊根邑을 향하여 차차로 노략하여 서울을 향하고 쳐 올라갔다.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을 지켰다. 이때에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대하여 주장하기를 “우리 군사는 오합지중이 되어서 싸움을 당하게 되면 흩어질 우려가 적지 않으니 차라리 전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서 좋은 진터를 잡아 배수진을 치고 뒤로 달아날 곳이 없게 하면 부득이 적군과 사생을 결단하게 될 것이오. 일본군은 천리 행군에 피곤한 군사요 우리는 잘 자고 잘 먹은 군사일뿐더러 우리 편은 먼저 험지를 잡아 진을 치고 있을 것인즉, 아직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서투른 지방에 온 객군인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강을 앞에 두고 이쪽에서 적군을 막으려 하면 적은 한강 저편에서 자리를 잡고 몇 날이든지 군사를 휴양하면서 우리 형세를 염탐할 것이며 또 그동안에 강을 건널 꾀를 낼 것이니 이왕 나라를 위하여 한번 싸우는 바이면 강을 건너가 배수진으로써 자웅을 결하는 게 옳소” 하였다.
김명원은 그 위인이 원래에 이러한 위험한 일을 행할 사람이 아니다. 김명원이 신각의 헌책을 변론하여 말하되 “적은 우리의 몇 배나 되고 조총 같은 유리한 무기를 가졌으며 또 전쟁의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승승장구하여 천리행군에 풍우같이 몰아오니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소. 또 훈련이 부족한 우리 군사를 가지고 천험인 한강을 스스로 포기하고 일부러 강을 건너가서 배수진으로 수만의 적과 싸운다함은 신립의 전철을 다시 밟음이라, 차라리 강을 굳게 지켜 적군으로 하여금 건너오지 못하게 하고 각도의 원군을 기다려 전후로 협공하는 것만 못하오” 하고 말하여 신각의 말을 불청하였다. 김명원은 적군이 강 저쪽에도 오기 전에 겁을 낸다.
그런 태도를 본 신각은 김명원이 하잘것 없는 줄 알고 서울로 유도대장 이양원을 찾아갔다. 이양원의 군사나 가지고 한번 싸워보자는 것이었다. 신각은 부원수라는 부월과 인수11)는 가졌으나 부하라고는 군관과 종사관 외에 옳게 백 명도 못 되었다.
그러나 도원수 김명원은 강 저쪽에 있는 적군이라도 보았지마는 유도대장인 이양원은 서울의 난민도 통제를 못하고 적군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 벌써 동소문東小門으로 빠져나가 달아났다. 신각도 하는 수 없이 되어 동소문으로 나가 양주楊州 방면으로 향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북안의 제천정12)에 올라 앉아서 산하의 풍경을 감상하며 술을 따르게 하고 종사관들로 더불어 먹 갈아 글씨 쓰던 습관으로 한시를 짓던 것이었다. 용병의 도와 장수의 도는 강론하지 않고 척후병조차 쓰지 않아 적군이 와도 눈에 보이지만 아니하면 알지를 못한다. 방금 한시에 운자를 다느라고 애를 쓰는 때에 문득 바라본즉 강 저편에서 적군이 보였다.
김명원은 창황하게 무기를 강물 속에 집어넣고 도원수의 군복을 벗어 버리고 미리 준비하여 둔 폐양립13)을 쓰고 짚신을 발에 신고 어떻게 피난길이 바빴던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달아나기를 시작하였다.
종사관 심우정沈友正이 “대감이 국가의 간성지장干城之將이 되어서 싸워 죽을지언정 어디로 간단 말이오?” 하고 김명원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김명원은 놀라고 당황하여 힘을 다해 소매를 뿌리치고 말도 안타고 달아났다.
심우정은 김명원을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하고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여 충의로 맹세 격려한 뒤에 적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아서 2일간이나 격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유도대장 이양원은 한강을 지키는 김명원의 군사가 달아났다는 헛소문을 듣고 그만 서울을 버리고 양주로 달아났다.
한편 소서행장의 제1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자기네의 고향에 들어오듯이 서울 동대문 밖에 이르러 보니 성내가 조용하여 잠자는 듯하였다. 행장은 웬일인지 몰라서 동대문 왼편의 수문을 깨뜨리고 성안에 들어서도 누구 하나 내닫는 사람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물건 파는 소매상인 하나가 있는 것을 붙잡아 와서 그 상인에게 사정을 물은즉 그 상인이 고하되 “상감님의 대가는 3일전에 파천하여 관서로 행행하시고 유도대장 이정승도 도망을 가고 하여서 도성 안이 텅 비었다” 한다. 행장 등 제장이 그제야 마음을 놓고 들어와 유진하였다.14)
소서군이 한성을 점령하던 그 이튿날 가등청정의 군대는 죽산 용인龍仁을 지나 한강에 이르러 제천정 아래에 결진한 도원수의 종사관 심우정의 잔군과 밤낮 이틀을 맹렬히 싸워서 심우정이 전사한 뒤에야 강을 건너서 남대문 밖에 이르니 성 안은 벌써 소서행장의 군사가 점령하였다. 청정은 행장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이 분이 나서 성내에 들어오지 아니하고 남대문 밖에 유진하였다.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국형의 연합군에 경상감사 김수의 군관 10여인을 합하여 군사가 5만이 넘는다. 이 삼도의 5만대군은 충주로 하여서 죽산을 거쳐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막을 요량으로 용인 땅을 향하여 왔다. 그 형세가 백리를 연하였다.
용인 북두문北斗門 산 위에는 일본군이 성채를 쌓고 있다. 이광은 험고한 광교산光敎山 아래에 진을 잡고 용장인 백광언白光彦 이시례李時禮의 무리를 명하여 곧 수일 내로 북두문 산의 적의 성채를 깨뜨리라고 하였다.(이시례는 일명 이지시李之詩라고 기록되었다.) 백광언 이시례는 용력이 절륜한 사람이었다.
이때에 중위장 광주목사 권율이 진언하되 “이제 적병이 이미 험한 산성을 쌓고 웅거하였은즉 우리 군사가 위를 향해 공격함이 불리하니 작은 적과 싸우지 말고 한강을 건너가서 임진강의 요해처를 지킵시다” 하였다. 이광 등 삼도 감사는 군사 많은 것만 믿고 권율의 진언을 불청하였다.
북두문 산상의 적장은 흑전장정 등이었다. 군사는 대우의통의 군사와 합하여 1만여인이었다. 삼도연합군의 선봉장 백광언 이시례는 군사 한 부대씩을 이끌고 북두문 산으로 가서 적의 성채를 향하여 활을 쏘며 도전하였으나 적군은 잠든 듯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백광언 이시례 두 장수는 생각하기를 일본군이 이편의 5만 대군과 자기네의 굳세고 용감한 위풍을 무서워하여 감히 나서지 못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하여 의기양양하게 두 선봉과 군사들은 모두가 마음을 놓고 말에 내려서 앉고 눕고 욕하고 하여 적을 깔보았다.
갑자기 고함을 치며 장창 대검이 졸지에 적의 성채부터 돌출하여 호랑이 떼와 같이 달려들어 마구 치며 접전한다. 백광언 이시례 양장은 미처 제 말을 찾지도 못하고 흑전장정의 부하 여러 장수의 검술에 목이 떨어져 죽고 군사들도 거의 전멸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일본무사 4, 5인이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장검을 내어두르며 적진으로부터 내달아와 5만대군의 진을 향하고 달려들어 도전하였다. 쾌마가 있는 삼도 감사와 군관급 종사관들은 기운차게 채찍을 들어 달아났다.
장수를 잃은 군사들은 군량과 병기를 내버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흩어졌다. 동복현감 황진과 광주목사 권율도 다 이 전장에 참가하였다가 같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5만대군이 무너지는 소리가 산 무너지는 소리와 같았다. 이렇게 흩어지는 통에 제바람에 놀라서 아군에게 밟히는 이도 많았다.15)
참소에 쓸려 명장 신각을 잃다
이광은 무사히 전주로, 윤국형도 탈 없이 공주公州로, 김수 역시 성주星州로 각기 돌아가 선화당16)에 들어앉았다. 용인에서 5만 대군이 내버린 군수물자는 길을 막아서 인마가 통행할 수가 없으므로 일본군사가 이것을 모아 불살라 버렸다.
삼도 감사의 5만 대군이 일본무사 4, 5인의 검광에 혼이 나서 무너진 사태보다도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과 우의정 유홍 세 사람에 관한 비극적 사태가 더 우습고 억울하다.
부원수 신각은 양주에 이르러 이양원을 만나서 그 군사를 가지고 때마침 올라오는 남병사 이혼李渾의 군사와 합하여 한양으로부터 노략질하려 내려오는 적의 소부대를 양주 해현17)에서 습격하여 대파하고 70급을 베었다.
일본군이 경상 충청 경기 삼도를 석권하는 동안에 조선장수가 적군을 쳐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양주에서 승전한 첩보를 듣고 경기도 백성들이 기뻐하는 모습은 실로 비길 데가 없었으며 각도의 방백 병수사에게도 영향이 적지 않았다.18) 그런데 웬일인지 부원수 신각이 양주에서 승전한 3일만에 개성 행재소로부터 신각을 베라는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 달려와서 신각의 목을 베었다. 도리어 죽은 적군의 원수를 갚아준 셈이 되었다. 그 내막에 깔린 사정은 이러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이 한강에서 달아나 임진강을 건너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려가지고 패전한 장계를 올려 자기가 한강을 지키지 못함은 부원수 신각이 도원수의 호령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먼저 달아난 때문에 있다는 것이라 하여 그 패전한 죄를 신각에게 전가시켰다. 우의정 유홍이 그 흥분 잘하는 어조로 “장수의 호령을 불복종하는 자는 참하여야 마땅합니다!” 하고 우겨서 참소를 하였다. 자기주장이 없는 선조는 유홍의 떠드는 바람에 그만 그 참소에 쓸려서 사실을 조사하여 보지도 아니하고 명장인 신각을 베라는 전교를 내린 것이었다.
이튿날 양주에서 부원수 신각이 적군을 파하고 70급을 베었다는 첩서19)를 받고 선조는 크게 후회하여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벌써 늦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