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임상실적 빼곤 안 봐요?
제약사 둘러싼 편견과 오해
제약바이오 기업을 평가하는 데 있어 실적은 큰 고려사항이 아니다. 임상성과가 뛰어나면 천문학적인 수익을 벌어들일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꾸준한 실적에도 임상성과가 두드러지지 않은 탓에 외면받는 전통 제약사들이 숱하게 많은 이유다. 하지만 신약개발은 장기전이다. 기술력보단 자금력이 빛을 볼 수도 있다. 아울러 새로 시작한 사업에서 또다른 성장의 길을 발견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제약바이오 산업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불과 몇년 전이다. 한미약품, 셀트리온, 신라젠 등 일부 제약사와 바이오벤처의 임상 및 기술수출 이슈가 부각된 게 시발점이었다. 신약의 가치가 재평가를 받았고, 국내에서도 블록버스터급(매출 1조원대 이상) 신약이 나올 거란 기대가 쏟아졌다. 국내에서 ‘제약바이오는 곧 신약’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고령화로 인해 의약품 시장이 커짐에 따라 신약개발의 중요성도 높아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약개발의 성과에만 초점이 맞춰진 나머지 임상 실적이 두드러지지 않거나 연구ㆍ개발(R&D) 투자 규모가 작은 제약사들은 시장에서 외면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력을 앞세운 바이오벤처가 뜨면서 전통 제약사들의 평가가 박해진 건 대표적인 예다.
국내 전통 제약사들의 매출은 대부분 일반의약품(비처방)과 전문의약품(처방)에서 나온다. 그중 일반의약품은 시장 규모도, 수익성도 낮다. 2018년 기준 일반의약품 시장이 전체 의약품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제약사들의 수익 대부분이 전문의약품에서 발생한다는 건데, 국내 제약사들이 제조ㆍ판매하는 전문의약품은 복제약(제네릭)이 대다수다.
제네릭은 특허가 만료된 신약과 똑같은 화학식으로 만들어 효능이 같은 약을 말한다. 별다른 임상을 거칠 필요 없이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을 통해 오리지널 약과 효능ㆍ효과가 같다는 것을 입증하면 손쉽게 판매할 수 있다. R&D 비용이 들지 않고, 위탁생산을 맡기면 생산설비도 필요 없기 때문에 많은 제약사들이 제네릭을 만든다.
하지만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신약과 달리 경쟁이 치열하고, 가격도 신약의 절반가량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큰 수익을 기대하긴 어렵다. 제네릭만 만들어선 성장가능성이 낮다는 거다. 시장에서 일반의약품ㆍ제네릭 위주의 제약사들을 저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신약을 개발하는 데 있어 기술력 못지않게 자금력도 중요하다. 신약개발은 장기전이다. 통상 하나의 신약을 개발하는 데 10년가량 걸린다. 당연히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적게는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수조원을 투자해야 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따르면 신약개발 성공률은 9.6%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얘기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에 신약개발의 벽은 더 높다. 임상에 실패할수록 투자비용은 더 늘어날 공산이 크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신약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신약을 개발한다. 제약사의 기본 사업 구조다. 하지만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은 이런 구조가 갖춰지지 않았다. 신약개발로 인한 성과가 아직 미미해서다.
기술력만큼 자금력도 중요
선진 의약품 시장인 미국과 유럽의 문턱을 넘은 국산 의약품은 각각 23개, 16개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합성신약ㆍ바이오신약ㆍ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는 미국ㆍ유럽 시장을 합쳐 8개, 3개, 17개에 그친다. 만족할 만한 실적을 내고 있는 약도 드물다.
외부에서 지원을 받거나 주식시장에서 주목을 받아 자금을 충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신약개발에 필요한 자금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수익성은 낮아도 꾸준하게 실적을 낼 수 있는 사업이 신약개발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실적이 있는 제약사가 임상성과는 있지만 자금력이 약한 바이오벤처보다 잠재력이 낮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2015년 기술수출 신화를 썼던 한미약품도 제네릭을 판매해 쌓은 자금력으로 신약개발 역량을 키웠다. 더구나 최근 신약개발을 위해 R&D 투자를 늘려가려는 제약사들이 적지 않다.
제약사들이 사업 노하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다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강기능식품과 코스메슈티컬(화장품과 의약품의 합성어), 외식, 식품산업 등 다양한 산업으로 세를 넓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건강기능식품ㆍ코스메슈티컬 시장은 전망이 밝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건강관리와 질병예방이 중요해지고, 화장품 시장에선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두 시장이 쑥쑥 크고 있어서다. 국내 건강기능식품 시장 규모(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4년 2조36억원에서 2018년 3조689억원, 세계 코스메슈티컬 시장(보건산업진흥원)은 2014년 44조6200억원에서 2017년 56조6800억원 규모로 부쩍 커졌다.
팔색조 변신 꾀하는 제약사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제약바이오 기업의 성장가능성을 반드시 신약에서 찾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제약사들이 신규 사업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통해 신약개발에 힘을 쏟을 수도 있지만 신규 사업 자체에서도 충분히 수익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제약업계 관계자는 “덩치가 있는 제약사 입장에선 십수년씩 걸리는 신약개발에만 매달리긴 어렵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신약개발도 좋지만 빠르게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 잘할 수 있는 사업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화장품ㆍ건강기능식품 시장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행히도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성장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약개발 측면에선 낙제점일지 몰라도 생존과 성장 측면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발전을 위해선 신약개발이 활성화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제약바이오 기업의 가치가 반드시 임상실적으로만 매겨져야 하는 건 아니다. 제약바이오의 성장활로는 여러 곳에 열려있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