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해를 삼키니 동양삼국이 어지러울 것이요

[다큐멘터리] 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6회

2012-10-10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임진1592년 4월 12일에 일본국 함대 700여 척이 15만 대군을 싣고부산항 앞바다에 다다랐다.

일본에서 이만큼 엄청난 수륙군이 출동하게 된 것은 관백關白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사상 전략적 행동이었다. 수길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그의 일생 행적을 알아볼만한 피아의 역사적 관계가 교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길은 일본 미장尾張(오와리)국1)의 중촌中村(나카무라)이라는 궁벽한 촌락에서 천문天文 5년 1536년 1월 1일 묘시에 출생하였다.

수길의 부친은 미우위문彌右衛門(야우에몬)이니 그 지방 영주 직전신수織田信秀(오다 노부히데)의 병사가 되어 전장에서 부상하고 절름발이가 되어 중촌에 돌아와 사냥꾼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길을 잉태할 때에 그 모친의 꿈에 해를 집어삼켰다 하여 수길의 아명을 일길환日吉丸이라 하였다. 또는 신지조申之助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아이 모습이 원숭이 같고 또 병신년 생이므로 신申은 원숭이라 그렇게 했다 한다.

수길이 점점 자라남에 사람들이 모두 그 생김새를 보고 원숭이라 부른다.

수길의 다음으로 딸과 둘째 아들을 두었다. 수길의 나이 8세가 되던 때에 그 부친 미우위문이 사망하였다.

저희 남매로 인해 그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이 수길의 어린 마음은 아팠다. 하루는 수길이 그 모친에게 출가出家하여 중의 상좌가 되기를 청하였다.

그 모친은 “아직 어린애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였다. 수길은 걱정 말라 하고 멀지 않은 광명사光明寺라는 절로 찾아가 중의 상좌가 되었다. 그래서 승려들에게 한문을 배우고 글씨도 배우는데 글씨에는 천재였다. 참으로 명필의 수완이 있었던 것이다.

수길은 틈만 있으면 마을로 뛰어나가 아이들을 모아가지고 장난하기를 판을 쳐서, 아이들을 양편으로 갈라 편싸움을 차리는 때면 남의 밭의 곡식물이 짓밟혀 없어지는 날이다. “광명사의 상좌중놈 때문에 마을이 망한다” 하는 원성이 일어나서 수길은 절에서 쫓겨났다.

수길은 집으로 돌아와 중촌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 노릇을 하게 되어 꼴도 베고 말똥도 주워 나르고 하였다. 12세 되던 해에는 미농美濃(미노)국2)땅의 옹기점으로 들어가 그릇 만드는 일을 배우더니 그 뒤에 미장국으로 돌아와서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있었다.

주인의 탐욕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돼지 같은 놈이라고 욕하고 나와 어느 벼슬아치의 집으로 들어가 고용살이를 하였다. 때마침 돌아다니며 굿하는 중들이 들어와 노는 것을 보고는 “에라, 머슴살이 그만두고 굿중패나 따라다니며 강산 구경이나 하여보자” 하고 굿중패를 따라나섰다. 5년 동안을 돌아다니며 원숭이 노릇을 흉내 내면 모든 사람이 웃느라 포복절도하였다.

그럭저럭 돌아다니다가 18세가 되던 해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러 남매들을 양육하기에 곤궁이 심하였다. 나갔던 자식이 장성하여 돌아온 것을 반겨서 맞이하나 수길은 빈손으로 돌아와 모친의 걱정만 끼치는 것이라 하여 다시금 집을 떠나려 하였다.

그 어머니는 가산을 털어 내다 팔아 영락전3) 열 냥을 장만하여 닷 냥은 집에 떼어놓고 닷 냥은 아들에게 건네준다. 어머니의 피 묻은 돈 닷 냥을 받아들고 집을 나올 때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수길은 “내가 어찌하면 모친을 위하여 앞길을 개척하나” 하고 돈 닷 냥을 자본삼아 장사를 해보기로 하였다.

수길은 바늘장사를 시작하였다. 이 지방이 수년간 전쟁이 계속되어서 교통이 두절된 곳이 많아 바늘 수요가 있으리라는 주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늘을 팔아보니 ‘독장수의 헛 구구’다. 며칠이 못 지나서 바늘도 없어지고 돈도 또한 떨어졌다.

수길이 낭패되어 빈송濱松(하마마쓰)이라는 마을 밖에 앉아서 옷의 이를 잡고 있었다. 빈송은 원강遠江(도토미)국4)의 영지이다. 그 영주 금천今川(이마가와)씨와 수길의 고향인 미장국 영주 직전織田(오다)씨가 다년간 전쟁을 계속해왔다.

바늘장사를 시작한 수길이 실패를 당한 이때에 빈송 마을 앞 큰길로 한 관리의 행차가 지나간다. 길가는 행인들이 모두 나막신을 벗고 납작 엎드렸는데 수길은 머리를 들었다. 칼을 찬 무사가 지나는 길에 평민이 만나면 땅에 납작 엎드리는 것은 그 시대의 풍속이었고, 무사의 칼로 평민의 목을 초개와 같이 베었다.

그 관리를 수행하는 군사가 칼을 빼어 들고 쫓아와 “이놈, 가자!” 하고 수길을 움켜가지고 그 관리의 교자 앞으로 나간다. 그 관리는 금천씨의 신하인 송하가병위松下嘉兵衛(마쓰시타 가헤이)라는 무사였다. 

병법이 고명하여 영주의 부하들에게 병법을 가르치던 선생님이던 사람이었다. 수길을 잡아온 군사들은 관리의 명령만 떨어지면 목을 치려고 기다렸다. 수길은 원숭이 재주를 내어 보였다.

그 관리는 “사람은 어쩌고 원숭이를 잡아왔느냐? 털 없는 원숭이 좀 봐라!” 하는 말로 군사들과 떠들었다. 그 관리는 수길의 형용이 원숭이 같은 것을 이상히 여겨서 “나를 따라 집에 가서 드난5)할 터이냐?” 하고 의향을 물었다. 이는 그 용모가 괴이한 인물을 놀림감으로 집에 두려 함이었다.

갈 곳이 없는 수길은 송하가병위의 집에 따라가 있기를 승낙하였다. 수길은 주인 송하씨가 심심하면 원숭이로 놀리는 것을 한 번도 성내지를 아니하고 그 환심을 얻었다. 그밖에 모든 일에도 민첩하게 거들며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게 되었으므로 주인이 가르치는 병법을 배울 수가 있었다.

송하씨의 집에는 조석으로 병법을 배우러 오는 제자가 많았다. 수길이 삼년을 지내는 동안에 그 제자들 중에 병법이 우수해졌다. 수길이 주야로 열심히 학습한 까닭이었다.

병법이 훌륭하게 된 뒤에 주인을 하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주인 송하씨는 영락전 3백냥을 노잣돈으로 내어준다. 수길은 집으로 돌아와 그 모친께 인사하고 모든 동생들을 만나보고 병법을 배운 일을 말하였다.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그러한 좋은 병법을 배웠거든 제 절 부처를 위하는 격으로 우리 영주를 섬기도록 해라. 우리 영주 직전씨는 너하고 선대부터의 인연이 각별하다, 너의 부친이 영주를 섬기다가 전장에서 창을 맞고 절름발이까지 되었으니 너는 충신의 자손이다. 그리고 요즈음 직전씨의 영토가 불 일 듯 늘어나는 판이다” 하고 권하였다.

직전씨는 그 지방에서 9대나 살아오는 동안에 직전신수의 대에 이르러 구 영주 사파斯波(시바)씨와 절연하고 독립을 하여 미장국 영주가 된 뒤에 그 아들 직전신장織田信長(오다 노부나가)이 그 부친의 유지를 받아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중이었다.

수길은 그 모친의 권고대로 직전씨를 찾아가 하인 노릇을 하였다. 하인들 중의 우두머리 되는 천야위문낄시(아사노 에몬)이 심부름을 시켜보니 입안에 혀같이 민첩하기가 짝이 없었다. 천야위문이 주인 직전신장에게 수길을 천거하였다.

신장은 혈기 왕성한 소년장군이다. 무예가 훌륭하고 백전노장 부하들 앞에서 팔뚝을 뽐내며 천하사를 논평하기를 장기판에 훈수하듯 하였다.

그만치 활달한 성품이며 장난질도 좋아하여 시가지로 나가 말을 달리다가 민가의 과일나무를 보면 닥치는 대로 따먹는 것이 그가 클 때에 하던 버릇으로, 그것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보통 귀공자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수길은 비로소 직전신장을 대하였다. 신장은 수길을 보고 껄껄 웃으며 “그것 참 괴물이로구나. 사람도 저러한 얼굴이 있으니” 하였다. 부중에 원숭이로 두고 보자 하고 수길의 소원대로 허락한 뒤에 주인의 짚신 신기는 소임을 맡겨 두었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주인은 사나운 말을 타고 달리다가 고의로 신짝을 땅에 떨어뜨리고 “원숭아!” 하고 부르면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예-!” 하고 벌써 수길은 발밑에 꿇어앉아 짚신짝을 신긴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제비와 같았다.

신장은 “대체 놈이 빠르기는 해!” 하고 칭찬한다. 일년을 지내고 나니 수길을 사랑하여 십인의 두목으로 올려준다. 십인의 두목도 두목인데 원숭이라는 조소적인 명호는 두목의 대우가 아니라 하여 이름을 중촌등길랑中村藤吉郞(나카무라 도키치로)이라 하였다.

차차로 대우가 올라 주인의 청지기가 되었다. 등길랑의 착 달라붙는 성질과 영리한 행동이 신장의 눈에 든 까닭이었다. 일 년에 쌀 30석의 녹을 받게 되니 그 모친을 봉양할 뿐만 아니라 송원松原(마쓰바라)씨의 딸에게 장가까지 들었다.

24세가 되던 해에는 주인이 칼을 차는 것을 허락하여 상당한 지위가 있는 무사가 되었다.

영록永祿 2년 1559년에 직전신장이 암창巖倉(이와쿠라)성과 도엽릎(이나바)산성을 공략한 뒤에 정병 5800명을 거느리고 미농국의 금천의원今川義元(이마가와 요시모토)을 정벌코자 하여 목증천木曾川(기소가와)을 밤에 건널 때에 등길랑이 앞을 서서 얕은 여울로 인도하였다.

이 지방은 전년에 밟아본 까닭이었다. 이 전쟁에 등길랑이 선봉이 되어 군사를 지휘한 때문에 신장이 승리하였다. 신장이 칭찬하되 “이번 싸움은 원숭이 공이 많다” 하고 비단 띠와 가죽신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 후 금천의원이 직전신장을 공격하게 되었다. 금천씨의 세력은 삼군三郡의 영주들을 가져서 신장의 세력에 비하면 여러 배가 되어 우세하였던 것이다.

금천씨는 갑주甲州(고슈)6)에 웅거한 무전신현武田信玄(다케다 신겐)과 인척이며, 관팔주7)에서 제일 거족인 북조씨강北條氏康(호조 우지야쓰)과도 사돈 간이다. 이렇게 혁혁한 무장의 집과 인척관계가 겹치니 평지돌출로 새로 일어난 직전씨의 집을 멸시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때에 무전신현은 40세요, 직전신장은 27세요, 수길은 24세요, 덕천가강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은 19세요, 조선의 이순신은 15세였다.

영록 3년 1560년 금천의원은 4만 6천의 대군으로써 삼로에 나누어 가지고 의원은 미장국의 통협간桶挾間(오케하자마)으로 쳐들어온다. 직전신장의 군사는 6천에 불과하였다.

신장이 준마를 타고 나섰다. 좌우의 부대들은 이 번 싸움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다. 통협간에 이르러 금천의원의 진과 충돌할 때에 홀연 호우와 강풍이 일어났다.

군사들이 정신을 잃게 되어 의원이 싸움을 거두려 할 즈음에 신장은 번개 치듯 내달아 돌격을 시작하였다.

직전신장의 부하 모리신조毛利新助(모리 신스케) 복부소평태服部小平太(핫토리 가쓰타다) 두 장수가 금천의원의 진중에 돌입하였다.

모리신조의 창이 의원의 투구를 칠 때에 그 뒤를 이어 복부소평태의 칼이 의원의 목을 베어 두 용장이 금천의원의 수급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때 등길랑은 금천의 대장 반미飯尾(이오) 형제를 베고 오는 길이었다. 금천의원이 죽은 뒤에 그 영지는 신장이 전부 점령하였다.

직전신장이 금천씨를 멸한 뒤에 근기8)지방에 세력을 신장코자 하여 수도인 경도京都(교토)에 상경하였다. 경도에는 황실과 장군의 집이 있고 일본의 주권을 잡은 수도였지만 지금에는 쇠약하였다.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족리足利(아시카가)씨의 치세 십삼대 이백여년 동안에 일본은 전국시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직전신장의 일행인 무사 50여 인 중에 등길랑도 포함되었다. 각 지방의 영주들이 경도에 올라오면 먼저 장군將軍(쇼군)의 집을 찾아보는 법이었다. 신장이 족리 장군의 집을 찾아가보니 이때 장군 족리의휘足利義輝(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신장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장국의 주인인 사파씨를 밀어내고 독립한 것이요, 또 족리의휘 장군의 중신이던 금천씨를 멸하였다는 것이었다.

전일에 직전신장의 부하들이 “장군가의 중신인 금천의원을 멸하고서 족리 장군을 방문함은 위태한 일입니다” 하고 만류하는 것을, 신장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를 잡겠는가?” 하고 큰소리치며 상경한 것이었다.

신장이 장군을 대하니 장군은 인사 끝에 “자네의 집에서 미장국 영주인 사파씨를 섬기다가 주인을 망쳐 놓고 또 무엇을 더하여 보려고 경도에 올라왔느냐?” 하고 질책한다.

신장은 그 대답을 동문서답한다. “근왕勤王하려고 와서 본즉 장군의 저택이 이처럼 퇴락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지방 제후들의 잘못한 일이니 한심합니다” 하고 대답하는 신장의 기상은 당당하다. 장군은 자기 집이 퇴락함은 제후의 잘못이란 말에 동정심이 일어나 도리어 친절하게 대우하였다.

직전신장은 장군의 소개로 정친정正親町(오기마치) 천황 앞에 친견 참배까지 하였다. 직전신장이 경도에 다녀온 뒤에 미장국 내 지다智多(치다)군의 영주 수야신원水野信元(미즈노 노부모토)을 통하여 준하駿河(스루가)국9)에 웅거한 덕천가강에 강화하기를 청하였다.

이것은 등길랑의 진언을 따른 것이니 수야신원은 덕천가강의 백부10)이다. 그 강화하기를 청하는 글은 아래와 같았다.

나는 경도에서 천황폐하의 황실을 호위하며 만민을 구제하려고 한다. 귀하는 천하의 영웅이니 하늘이 천하대사를 우리 양인에게 부여하였다고 생각한다. 귀하는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것이요 나는 서남방면에서 활동하기를 개시하여 천하를 평정하자.

덕천가강은 직전신장의 강화 요청에 승낙하였다. 신장은 가강과 강화한 뒤에 그 계획을 세운 공으로 등길랑을 사적士籍에 올려주고 녹을 많이 주었다. 등길랑은 종군한지가 5년이었다.

하루는 직전신장이 집안 장정 3백명을 양편으로 갈라 전쟁을 붙이고 제장들이 번갈아 나서서 지휘를 시키는데, 훈련이 없었던 하인들이라 다른 장교가 지휘하면 진세가 문란하여 혼잡하다가도 등길랑이 나서면 겨우 5척 되는 작은 키에 어디서 큰소리가 나오는지 구령을 부르면 장정들의 정신이 새로 나서 진세가 엄숙하게 되는 것은 제장들 중에 제일이 된다.

백전을 경험한 노장들도 그 수완을 보고 감복한다. 신장이 새로 사족士族이 된 등길랑의 자격을 일반에게 알리려 함이다. 이날 신장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에 감격이 넘치는 등길랑은 눈물을 흘렸다. 두 영웅의 심리는 깊이 결탁되었다.



정리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itvf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