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約의 배신 空約의 기만
[Cover 총론] 대선공약의 불편한 진실
2012-10-04 이윤찬 기자
올해 5월 인도의 사회주의당은 우타르프라데시(UP)주 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경쟁정당인 국민회의당보다 무려 200여개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압승이었다. 승리의 원동력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유권자의 표심票心을 현혹할만한 공약이 판세를 갈랐다. 사회주의당이 내건 공약은 대략 이랬다. “… 10학년 이상 학생들에게 태블릿PC를 무상제공하겠다. 농촌지역에는 하루 20시간 전기를 공급하겠다….” 유권자는 사탕 같은 공약에 홀렸고 사회주의당에 소나기 같은 몰표를 선물했다.
모로 가든 기어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사회주의당은 흥미로운 공약으로 ‘압승’과 ‘권력’이라는 전리품을 챙겼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 당의 공약公約 대부분이 공약空約이라서다. 따져보자. 태블릿PC 무상제공쯤이야 예산을 늘리면 어떡해든 해볼 만하다. 그러나 농촌에 20시간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도의 수도 델리조차 하루 평균 3~4시간 전기가 끊기기 때문이다. 예산을 늘려도 수년, 아니 수십년 안에 우타르프라데시주가 ‘환상적인 전기세상’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회주의당의 공약철회는 어쩌면 시간문제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쇄신파 의원들의 ‘747공약 폐지’ 요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올 9월 7일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통합당 강기정 의원이 김황식 국무총리에게 물었다. 김 총리의 답은 이랬다. “폐기해야 할 공약이 아니다. 임기 내에 747을 달성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사과해야 할 부분도 아니다.”
과연 그럴까. 747은 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을 뜻한다. MB가 17대 대선 선거기간 내내 수없이 떠든 말이다. 김 총리의 말처럼 747은 대선공약이 아니다. 7% 경제성장률만 공약이고, 4(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7대 경제강국)은 비전이다. 그렇다고 747의 실패를 용납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747의 기초는 7, 다시 말해 경제성장률 7%다. 7을 달성하지 못하면 ‘4’도, 또 다른 ‘7’도 없다.
그런데 MB정부는 경제성장률 7%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한국의 올 2분기 경제성장률은 2.4%에 불과하다.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MB가 집권한 2008년 이후 4년 동안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3%를 갓 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자타공인 ‘경제대통령’으로 불렸던 MB의 성적표치곤 낙제점에 가깝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감안 안했나
MB쪽 인사들은 이렇게 반박할 게 뻔하다. “집권하자마자 글로벌 불황이 시작됐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그럴싸한 변명이지만 무책임한 말이다. 국내 경제지표는 대외변수에 따라 출렁인다. 전형적인 수출 중심 국가라서다. 세계가 기침을 하면 한국경제는 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성장률 7%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MB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MB의 실책은 연 7%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 게 아니다. 세계경제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공약을 내세운 게 문제였다. 2007년 10월 경기침체를 예측할만한 ‘전조前兆’가 있었다. 미 부동산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루비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폴 크루그만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구동성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MB가 7%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747’을 이루겠다고 공언하던 바로 그 무렵이다.
글로벌 경제상황을 꼼꼼하게 검토했다면 7% 경제성장률이라는 공약은 탄생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면 747은 없었고, 유권자는 MB를 보면서 ‘경제대통령’을 상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만약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했음에도 7% 경제성장률을 공약했다면 이는 국민을 속이기 위한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국내 정치인들의 책임회피성 발언과 기회주의적 사술은 버릇처럼 굳어져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747만이 아니다. MB정부는 동남권 신공항•과학벨트 등 공약으로 내세운 대형 국책사업을 ‘경제성•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효화했다. 명분은 국익國益이었다. 이 대통령은 “전문가들이 참여해 모든 공약의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고 경제성을 따지는 게 아니다”며 공약을 철회한 이유를 설명했다. 변명치곤 궁색하다.
한나라당은 2007년 11월 17대 대선 정책공약집 「일류국가 희망공동체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이 책 마지막 페이지에는 한나라당 일류국가비전위원회 김형오 위원장(당시 직함)의 편집후기가 실려 있다. “400여명의 정책전문가들이 참여했고, 180여 차례 토론과 회의를 거쳤다.” 난상토론을 통해 MB의 공약을 혹독하게 검증했다는 것이다. ‘모든 공약을 전문가가 검토하지 않는다’는 MB의 변명은 거짓이다. 공약을 철회한 것은 해당 공약의 현실성이 없었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MB만 그런 것도 아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외면했다. 선거기간 내내 ‘쌀수입 개방 절대 불가’를 목청껏 외쳤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우루과이라운드(UR)를 체결, 쌀시장을 열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과 세계 5강 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7% 경제성장•250만개 일자리 창출 공약 역시 공수표空手票로 끝났다.
역대 대통령 공약이행률 형편 없어
전현직 대통령이 공약을 뒤엎으면서 쏟아내는 항변은 대동소이하다. 공약을 만들 때와 지금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약이 손바닥 뒤집히듯 쉽게 바뀌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권좌에만 오르면 끝이라서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도 국민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헛공약’을 남발한다는 얘기다.
공약은 공적계약이자 담보물건擔保物權이다. 대통령이 을乙, 유권자가 갑甲이다. 대통령 후보가 공약을 담보로 유권자의 신임을 얻어간 것이다. 집권하기 위해 헛된 공약을 쏟아내서도, 권력을 잡았다고 마음대로 폐기해서도 안 된다. 「일류국가 희망공동체 대한민국」의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이 정책공약집에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국정철학과 정책대안을 담았습니다. 꼼꼼히 살펴 주시고 5년 후에도 한나라당이 이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5년째다. 그러나 지켜볼만한 공약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한국의 대선공약. 바람만 불어도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성과 다를 바 없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공약公約의 배신, 공약空約의 기만. 고질병이다.
이윤찬 기자 chan4877@thescoop.co.kr | @itvf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