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살리는 게 진짜 ‘다스림’

김대곤의 CSO 리더십

2012-09-19     김대곤 오방리더십연구원장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과 지도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관점에 따라 인간의 행복이 좌우된다. 먼저 인간의 자연관부터 살펴보자. 고대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의 하위 존재로 생각해 자연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중세 인간은 자연 대신 신의 개념을 부각시켰다. 초기에는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유일신 개념이 도입되면서 인간과 신이 분리됐다. 그 결과 피라미드의 상층부인 1%를 신이 차지하고, 인간은 그 바탕인 99%를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대신 종교 지도자만이 신의 힘을 배경으로 상층부에서 인간을 양육 혹은 지배하는 위치에 올랐다. 이로 인해 인간(보통사람 혹은 피지배자)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고, 종교 지도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과 소통하려는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혁명이 일어났다.

이 효과는 산업혁명으로 나타났고 나아가 자본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인간 이성의 우월성을 학습해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보고, 이를 통해 에너지를 추출했다. 여기에 산업혁명으로 조성된 자본의 힘이 가해지면서 오늘날의 거대 물질문명을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인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양극화가 나타났고, 평등과 분배의 이상향을 제시하며 반기를 든 것이 공산주의였다. 공산주의는 비생산성으로 인한 경제적 성과부진으로 자본주의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성공한 모델로 생각한다. 문제는 그동안 인간에게 순종해왔던 자연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공해•환경오염•자원의 고갈•지구온난화 등의 재앙이 나타나면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것이 생태학이다.

이에 대해 기술낙관론자는 “걱정하지 마라”며 “과학기술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환경의 중요성과 함께 경제의 중요성도 인식한 생태경제학자도 나타났다. 이들은 기술비관론자다.
기술비관론자는 설사 환경문제 해결이 가능하더라도 그에 따른 비용이 엄청나게 소요될 수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발생하는 지구의 재앙을 걱정한다. 인간의 지도자관은 어떤가. 자연, 힘있는 자(왕, 귀족), 백성 등 인간의 자연관과 동일한 시각이다.

백성은 영주가 주는 먹거리에 안주하며 노예같은 생활에 만족했다. 반면 의식 있는 자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시민혁명이고, 민주주의 시대의 시작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라는 최고 지도자를 스스로 뽑는 정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경제 분야는 달랐다. 경제 지도자를 스스로 뽑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선택함에 따라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가 됐다. 자본의 힘과 효용성은 날이 갈수록 막강해졌다.

신의 힘을 배경으로 종교지도자가 군림했듯이 자본을 배경으로 한 1%의 자본가들이 99%의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가 됐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자본주의의 중심부 미국에서 일어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운동이다. 최근 한국에서 거론되는 경제민주화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자칫하면 여태까지 쌓아온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이 후퇴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거대자본의 횡포를 방관할 경우 환경파괴와 자원고갈, 그 보다 중요한 인류의 행복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요즘 발생하는 성범죄, 자살률 급증, 결혼회피 등이 그 징후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태경제적 리더십, CSO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경제도 중요하고 생태도 중요하다. 그보다 인류행복이라는 중심부터 잡아야 한다.

국내총생산(GDP)의 증가나 수출 증대, 매출액의 증가가 국민 개개인, 그리고 조직원 개개인의 행복으로 연결될 때 진정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를 다 살리는 것이 진정한 다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