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없는 혁신 아이콘 변화 없는 혁신 아이폰

스티브 잡스의 망령

2012-09-18     정다운 기자

애플 스티브 잡스 창업주의 빈자리가 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9월 12일(현지시간) 열린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는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국 금융전문 매체 마켓워치는 “새로울 게 없는 아이폰5를 구매하느니 여전히 좋은 제품인데다 가격까지 내려간 아이폰4S를 구매하는 게 낫겠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 역시 “소비자의 감탄을 자아낼만한 요소가 없다”고 혹평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방송사 CNBC와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아이폰5 출시 첫 주에 최소 1000만대가 팔릴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에는 1억5000만~2억4000만대의 아이폰이 출하될 전망이다. 9월 12일 주가 역시 1.39% 오른 669.79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하지만 이는 잡스의 후광 덕이라는 시각이 많다. 아직도 애플 주위를 떠도는 잡스 영혼이 보장한 판매량이라는 말이다. 허전한 소비자들은 잡스를 붙들고 있다.

지루했던 신제품 발표회

죽은 잡스가 영혼으로 나타나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는 내용의 패러디 영상은 개시된 지 이틀 만에 6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애플 팀 쿡 CEO가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임에 틀림없다. 잡스가 ‘애플=잡스=혁신’의 공식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부분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파리 붙은 사과 하나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기까지 잡스는 두 가지의 철칙을 고수했다. ‘비밀주의’와 ‘하나 더(One more thing) 법칙’이다.

잡스 시절 애플 제품은 객관적 스펙보다 특유의 이미지와 정체성에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을 구매력으로 연결시킨 것이 바로 잡스의 파워다. 그리스 신화 속 선원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듯 소비자는 애플 제품에 흠뻑 빠졌다.

하지만 애플을 애플답게 만들던 특징이 팀 쿡 체제에서 사라지고 있다. 잡스가 고수했던 두 원칙이 흐지부지됐기 때문이다. 애플 제품을 감싸던 사이렌의 후광이 사라지자 소비자는 냉정하게 돌변했다. 제품 사양에 엄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 거다. 신제품 공개 후 아이폰 스펙 논란이 일어난 배경이다.

잡스는 애플을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회사로 만들었다. 철통보안에 집착했고 제 아무리 측근이라도 믿지 않았다. 평소 입버릇처럼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 응징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내 비밀을 블로그에 올렸다는 이유로 10대 청소년을 고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무너지는 잡스의 비밀주의

수하 직원들도 믿지 않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해 일하는 직원들은 자신이 어떤 제품을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애플의 직원들도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보고서야 감탄하는 식이었다. 완성된 큰 그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잡스밖에 없었다. 철저한 보안 덕분에 신제품 발표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비밀주의는 애플의 개성을 형성하기 위한 잡스의 노고이자 의도한 전략이었다. 팀 쿡은 회사의 보안유지에 소홀했다. 아이폰5가 출시되 기 전 나돌았던 정보들과 아이폰 5의 실제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은 쿡의 성향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NFC(10㎝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다양한 무선 데이터를 주고받는 통신기술) 기능•지문인식 잠금해제 등을 제외하고는 유출정보 대부분이 사실로 판명됐다. 덕분에 신제품 발
표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다시 확인하는 지루한 자리가 됐다. 미국의 한 네티즌은 “마치 가전회사의 신제품 냉장고 런칭 행사를 보는 듯 했다”고 표현했다.

씨넷은 “애플 역사상 제품 공개전 가장 많은 정보가 유출돼 팬들을 놀라게 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잡스가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2007년 아이폰 출시 때부터 전문 블로거•기자들의 예상은 막상 신제품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은 9월 5일 “IT전문 매체들 사이에서 아이폰5와 관련된 정보들이 난립하고 있다”며 “애플 창사 이래 가장 극심하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항아리형 이어폰이 나온다”는 악세사리 관련 세부적인 내용까지 유출됐다.

팀 쿡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정보가 사전에 누출되면 중지서한을 보내고 소송까지 불사하던 잡스와는 다른 행보에 “루머를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일었다. 쿡이 비밀유지에 실패한 것은 이미지만 추락시킨 게 아니다. 실적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이폰5의 정보가 유출되면서 기존 제품인 아이폰4S의 판매량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명백한 팀 쿡의 실책”이라고 꼬집고 있다. 루머를 통해 환상적으로 포장된 아이폰5를 두고 아이폰4S를 살 소비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질책이었다.

One More Thing의 경제학

실제로 유출된 정보들은 회사의 리스크가 되어 돌아왔다. 아이폰5 출시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자 아이폰4S 판매량이 급감했다. 올 3분기 아이폰4S의 판매량은 2분기에 비해 26% 줄어든 2600만대에 그쳤다.

팀 쿡 취임 후 없어진 애플의 유물은 또 있다. 잡스의 전매특허 중 하나였던 ‘하나 더(One More Thing)’다.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이 끝날 무렵이면 감사인사를 하는 척하다가 돌연 “하지만 하나 더 말할 게 있습니다(But there's one more thing)”라는 멘트와 함께 애플의 혁신적 기능을 소개했다.

혁신은 애플의 개성을 빛나게 하는 완벽한 장식품과 같았다. 잡스의 ‘하나 더’는 애플의 끝나지 않는 혁신의 상징이자 프리미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애플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돼 버렸다. 혁신의 원동력이자 애플의 날카로운 이빨이던 잡스가 없어서다. 팀 쿡이 잡스의 번뜩이는 창의력을 따라잡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인다. 팀 쿡은 12일 신제품 공개 행사장에서 아이폰5에 대해 “수준이 다른 엄청난 도약을 한 제품”이라고 했지만 시장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아이폰4S보다 길어지고 얇아졌을 뿐 경쟁사를 압도할만한 특징이 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한마디로 아이폰5에는 혁신이 빠져있다는 얘기다. 특히 약점 보완에 치중한 모습까지 보여 ‘애플답지 않다’는 반응도 얻었다. 혁신적 제품을 내놓기보다 시장 트렌드에 맞춰 아이폰을 보강하려는 팀 쿡의 모습에 참석자들이 실망한 것이다.

벼랑 끝에 선 팀 쿡

애플이 아이폰5의 주요 셀링 포인트로 삼은 4인치 화면과 롱텀에벌루션(LTE) 지원은 스마트폰 업계에서 이미 진부한 사양이다. 포브스는 “애플이 점차 평범한 전자 회사로 전락하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며 “애플이 안전한 베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포춘의 선임기자 라신스키는 “쿡 취임 후 애플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경영상의 최우선 순위가 ‘경영 효율화’로 바뀐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경영효율화에 집착하는 쿡의 모습이 애플에 녹아들면서 잡스 때의 혁신 정신이 쇠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팀 쿡이 실패한 CEO라는 얘기는 아니다. 쿡은 잡스보다 정이 많고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그게 누구든, 국내든 해외든 다르지 않다.

지난 5월 팀 쿡이 워싱턴의 미국 의회를 방문해 정치인들을 잇달아 만난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됐다. 정치권과 거리를 뒀던 잡스와 달리 팀 쿡은 정치권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경영자로서 나쁘지 않은 처신이라는 평가다. 이뿐만 아니라 팀 쿡은 중국 애플 공장의 노동 환경 개선과 애플 직원들의 행복도 증진 등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능력 있고 인간미 넘치는 CEO지만 시장의 반응은 아이러니컬하다. “좋은 회사가 생겼지만 혁신 기업은 사라졌다”는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팀 쿡이 잡스의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평가를 들을 이유가 없다. 팀 쿡이 그렇게 못난 CEO인 것도 아니다. 수치적으로 봐도 팀 쿡의 경영능력은 흠잡을 데 없다.

잡스 사임 당시 374달러였던 애플 주가는 9월 13일(현지시간) 682.96달러로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 1년 사이 애플의 시가총액은 6402억 달러(약 722조원)으로 불어 미국 역사상 최대 기업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팀 쿡은 여전히 애플, 아니 잡스가 만든 회사의 CEO다.

잡스의 혁신능력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팀 쿡으로선 ‘잡스의 망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죽은 잡스가 산 팀 쿡을 벼랑에 몰고 있다. 잡스, 그는 아직 죽지 않은 듯하다.

정다운 기자 justonegoal@thescoop.co.kr|@itvf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