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됨으로 천하를 호령한 이유는…
고전경영 | 제갈량諸葛亮의 진면목 ②
2012-09-04 심상훈
나관중 「소설 삼국지」를 두고 학자들이 말하길 ‘칠실허삼七實虛三’이라고 한다. 70퍼센트는 사실이나 30%는 허구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동양사 스토리텔링의 일인자이자 문학•역사•철학을 통섭한 중국 국보급 사학자 리둥팡黎東方(1907~1998) 선생도 익히 동조同調한 바다. 리 선생은 책에서 ‘제갈량의 사람됨諸葛亮的爲人’을 정통사학자의 관점으로 접근해서 상세히 고증한 바 있다.
제갈량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패했던 사마의는 평생 다른 사람 손에 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갈량에 대한 그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사마의는 촉한에서 철수하면서 제갈량의 군영과 보루 배치를 살펴보고 저도 모르게 ‘천하의 기재奇才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제갈량에 대한 존경과 승복을 드러내고 만 것이지요. (중략) 제갈량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유비에게 떳떳했으며, 그의 가족과 친구, 부하에게 떳떳했고, 그 자신에게 떳떳했으며, 그가 평생을 두고 세운 이상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열묘는 더 이상 유비의 묘가 아니라 모두가 다 아는 바대로 무후사가 된 것입니다.
일찍이 당 왕조 때에 소열묘는 이미 무후사로 변해 있었습니다. (중략) 그는 분명히 문무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진수는 오직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만을 인정하고 군사 전략에는 그다지 존경을 표하지 않았지요. 그는 정말 전투에 재능이 없었을까요? 그가 사마의를 이겼던가요, 아니면 사마의가 그를 이겼던가요? 많은 사람이 진수의 이러한 평가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진수는 진晉 왕조의 관리였고, 진 왕조 황제의 조상이 바로 사마의입니다. 진수는 아마도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수가 제갈량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수는 제갈량이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면서도 이길 수 없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사실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맞서 싸울 적들이 모두 인재 중의 인재였다. 예를 들어 사마의가 그렇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감당하니 공격과 수비가 서로 달랐다.’ 사마의의 병사는 30만이었고, 제갈량의 군사는 겨우 10만이었다고 합니다. 정확히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는지는 고증하기 어렵지요. 섬서성과 감숙성에 있던 위나라 군사가 한중에 있던 제갈량의 병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소하는 한신을 추천할 수 있었고, 관중은 왕자성보王子城父를 추천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한신이나 왕자성보에 비견할 만한 명장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리 선생이 이야기하는 ‘제갈량의 사람됨’이 매우 객관적으로 평가돼 있다. 나관중의 소설처럼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계책과 묘수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의 천재됨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다만 제갈량이 보통 사람됨을 가지고 어떻게 촉한 승상 자리에 오른 것인지, 그리고 2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은 꼭 짚어봐야 한다.
<다음호에 계속>
심상훈 편집위원 ylmfa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