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도로 주행금지에 도무지 달리지 못해

[커버 파트1] 황당한 저속전기차 시승기

2012-08-29     심하용 기자

미래의 교통수단으로 거론되던 전기자동차. 하지만 진취적인 ‘미래’에도 차별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차별의 대상은 저속전기차다. 아무리 용을 써도 갈 수 없는 길이 많아서다. 차별이 남아 있는 한 전기자동차는 여전히 미래의 교통수단일 뿐이다.

기름값이 오르면서 전기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구매가격이 일반 자동차의 2~3배에 달하고, 충전소가 적다는 점이 부담스럽지만, 양산만 되면 점차 개선될 것이다.

특히 세컨트카로 주목을 끌었던 저속전기자동차(저속전기차)의 성능은 만족할 만하다. 무엇보다 충전배터리 수명이 괜찮다. 매일 1회씩 완전방전과 완전충전을 한다고 가정할 때 2000회까지는 끄떡없다. 월 2만원의 전기료로 최소 5년 이상은 탈 수 있다는 이야기다.

60㎞를 기준으로 고속전기차와 저속전기차가 나눠졌다지만 서울시청 직원의 말을 들어보면 서울시 전체 도로의 97%를 주행할 수 있다. 더구나 어딜 가나 막히는 서울에선 구분의 의미는 없다. 차가 작아 운전이 쉽다는 점도 장점이다.

저속전기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보기 전에 머릿속으로 두드려 본 계산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격과 충전소 문제 외엔 지적할 만한 게 없다. 이 정도면 근거리 출퇴근용으로 흠잡을 데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전기차가 ‘저급’도 아닌 ‘저속’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해프닝이 시작됐다.

시승날짜는 8월 22일 수요일 10시. 가급적 교통이 원활한 시간대를 정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평일 오전을 잡았다. 삼성역 인근의 AD모터스 본사에서 시승용 저속전기차를 인도받았다.

이름은 ‘체인지(Change)’. 휘발유를 쓰는 99.99%의 일반 자동차와는 다르다는 걸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다. 길을 지나다 우연히 이 전기차를 보면 누구든 다시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쳐다볼 것 같은 꽤 깜찍한 디자인이다.

시승코스는 약 50㎞로 잡았다. 먼저 삼성역을 출발해 이태원 용산구청에서 잠깐 볼일을 본다. 이후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노보텔앰버서더 호텔 커피숍에서 취재원을 잠깐 만나고 삼성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체인지’의 최대주행거리가 70㎞를 넘는다지만 아직은 충전소가 많지 않아 조금 여유를 뒀다.

출발한 지 5분도 안 돼 U턴

스마트폰용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용산구청을 목적지로 찍고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걸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잡음이 없다. 경차 수준의 차라는 것을 감안하면 승차감도 나쁘지 않다.

잠시 후 내비게이션은 영동대로와 봉은사로를 거쳐 올림픽대로를 타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저속전기차는 5분도 채 안 돼 내비게이션과는 정반대로 유턴해야 했다. 올림픽대로를 나가는 입구에 저속전기차 금지 표지가 떡 하니 붙어 있어서다. 녹색으로 표시된 저속전기차를 괴물 취급하듯 빨간색으로 그어 놓은 표지판은 험상궂은 표정의 문지기를 연상시켰다.
그래도 괜찮다. 서울시청 직원이 말하길 저속전기차가 다니는 길에 제한이 좀 있지만 서울시 도로의 97%는 모두 다닐 수 있다. 못 가는 길은 단지 3%다. 대수롭지 않았다. 올림픽대로는 3% 중 하나일 뿐이었다. 테헤란로를 거쳐 반포대교를 지나는 길을 선택해 용산구청에 도착했다.

꽉 차 있던 연료계기는 정체가 심한 테헤란로를 빠져 나오면서 10칸 중 2칸이 사라졌다. 구청에 온 김에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안내데스크를 찾았다. 저속전기차 충전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전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다산콜센터로 전화해 충전소 위치를 확인했다. 서울시 친환경교통과 담당자는 시청 서소문 별관, 남산별관, 서울숲 등 저속전기차 충전소를 이곳저곳 알려줬다. 하지만 그 역시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오토바이도 가는 길 못 가

대신 그는 “스마트폰으로 ‘EV충전인프라정보서비스’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면 저속전기차 충전소를 쉽게 알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공공기관에서 저속전기차를 구입했기 때문에 각 구청마다 충전소가 있다”고 설명해줬다. 용산구청에서 난데없이 저속전기차 충전소를 물어본 이유다.

“저속전기차 충전소가 어디 있나요?” 안내원은 충전소를 묻는 질문이 처음인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저희 구청에는 전기차 충전기 자체가 없습니다.” 다시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다.

“모든 구청에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중에 알아보니 특별히 발급된 결재카드가 있어야 충전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여러 모로 차별을 받은 느낌이다. 그래도 구청 지하주차장에 청소용 콘센트가 있어 충전을 할 수는 있었다.

점심식사 후 다음 코스로 이동할 곳은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노보텔앰베서더 호텔. 내비게이션은 원효대교를 지나 용호로-대방로-시흥대로를 지나는 길을 알려줬다.

또 문제가 생겼다. 원효대교를 지나려고 할 때 다시 한 번 험상궂은 표지판이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지 말라는 거였다. 곧바로 유턴을 할 수 없는 상황에 황당해 하고 있을 무렵, 더 황당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쌩하고 옆을 지나던 125㏄ 오토바이는 원효대교를 보무도 당당하게 건넜다. 한 순간 전기차가 오토바이보다 못한 차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차를 돌렸다. 마포대교를 타고 신길로를 이용해 시흥대로로 진입했다. 간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돌아간 셈이다.

저속전기차 ‘체인지’의 앞을 가로 막는 길은 이후에도 많았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부터 시작되는 시흥대로도 주행금지 구역이었다. 호텔 쪽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호텔 앞 대로는 저속전기차가 다닐 수 없는 ‘70㎞ 이상’ 도로여서다.

한참 후, 취재원과의 미팅을 마치고 맞은편 대형 마트에 들렀다. 찌는 날씨에 전기배터리를 아끼느라 에어컨도 못 켜고 다니다보니 여름 기온이 그대로 전해져서다. 그런데 30분 정도 땀을 식히고 나오는 길에 저속전기차 ‘체인지’가 시흥대로를 지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더위가 다시 밀려 왔다.

독산동 홈플러스를 끼고 있는 교차로에 들어서는 길목에는 몇 번 마주친 그 험상궂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도로교통 표지판을 봤지만 그만큼 황당무계한 지시를 내리는 건 없었다. 지시는 좌우회전 금지. 저 멀리 교차로에는 모든 차량의 직진을 금지하는 표지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유턴해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아니다. 도로도 좁은 왕복 2차선이다. 꼼짝 말라는 거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게 되면 분노는 사라지고, 이성이 생기게 마련이다. 과연 나와 이 저속전기차가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일까.

삼성역으로 돌아오는 길. 결국 금지된 남부순환로를 선택했다. 이제는 그냥 가기로 했다. 딱지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다 좌우회전 금지만큼 황당한 사실을 하나 더 발견했다. 남부순환로 중간 중간에 저속전기차 주행 가능 구간이 있었다. 자동차가 아무리 작다지만 호주머니에 넣었다 꺼냈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책입안자들이 몰랐을 리 만무하다.

삼성역 AD모터스 본사에 도착했을 때, 전기를 아낀 덕에 방전은 면했다. 하지만 저속전기차를 타고 서울시내의 초행길을 만나게 된다면 주행 가능한 길을 찾아 헤매다 방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교통표지판의 횡포, 직진·좌·우회전 금지

시승이 끝난 후, 서울시청에 받은 자료를 통해 저속전기차 통행금지 구간을 살펴보니 분명 서울시 모든 도로의 3.15%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숫자놀음에 불과했다. 중요도로를 모두 빼 버리고, 일반도로에서도 구간 구간을 막아버리니 저속전기차가 갈 수 있는 도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 순환로 등 주요 교통로는 자동차 전용도로로 규정돼 다닐 수 없다.

저속전기차의 주행을 왜 막아놨는지 서울시청 담당자에게 물었다. 그 담당자는 “시속이 느려 찻길이 막히기 때문에 60㎞ 초과 도로는 금지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저속전기차의 주행을 막는 정책은 교통을 더욱 혼잡하게 만들지 모른다. 도로를 계속 방황하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유턴을 해야 하며, 난데없는 곳에서 좌우회전을 해 ‘저속전기차만 금지된 도로’를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속전기차 운전자에게 돌아오는 건 과태료 딱지뿐이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itvf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