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우리 vs 너희, 민망한 태극문양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부산행 ❸

2016-12-30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할리우드의 모든 좀비영화가 그렇듯 영화 ‘부산행’의 구도 역시 단순명쾌하다. 좀비와 비非좀비의 이분법적 대결구도다. 세상에는 좀비와 비좀비라는 단 하나의 구분만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는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 arkness) 단 두 부류만 있다”는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유명한 이분법적 세계관처럼 말이다.

니부어에게 ‘빛의 자식들’은 기독교도와 서양, 미국인이다.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그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미국 정신의 한 축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인들은 근본주의적 기독교도(chiristian fundamentalist)들이다. 근본주의는 세상을 선과 악의 단순화된 대결구도로 파악한다. 단순한 이분법적 대결구도인 ‘좀비’ 장르가 유독 미국에서 대량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되는 이유도 이런 미국인들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국인들의 ‘좀비사랑’은 새삼스럽지 않다. 할리우드가 쏟아내는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아이언맨’ 등 수많은 ‘맨(man) 시리즈’는 하나같이 단순하고 명쾌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적 선악구도로 일관한다. ‘빛의 자식’인 온갖 ‘맨(man)’들이 ‘어둠의 자식들’을 물리치는 식이다. 어둠의 자식들은 대부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걸핏하면 핵폭탄이나 화학무기를 만지작거리며 인류멸망을 꿈꾸곤 한다. 이토록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 미국인들은 열광한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상징되는 ‘반공주의(An ti-communism)’는 이분법적 선악구조의 결정판이다. 공산주의가 아닌 것은 모두 선으로 치환할 수 있고, 공산주의 격퇴라는 목적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 ‘반공反共’이기만 하면 아무리 극악한 독재자라 해도 미국의 친구가 되고 혈맹이 된다.

부산행’ KTX에서는 좀비만 아니면 간부급 조폭쯤으로 보이는 상화(마동석), 불결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노숙자(최귀화) 모두 엘리트 펀드매니저 석우(공유)의 친구가 되고 혈맹이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분법적 세계관’은 생소하고 이질적이다. 우리 고유의 사상은 이분법적 사유와는 전혀 다른 태극철학과 원융회통圓融會通, 이를테면 화쟁和諍의 세계관이다. 태극의 음陰과 양陽이라는 이질적인 성질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서로를 안고 맞물려 돌아간다. 원圓은 거대한 순환, 융融은 화합, 회會는 모임, 통通은 서로 통함을 의미한다. 함께 모여 소통을 통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더욱 높은 차원에서 통합을 이루는 원융회통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고유의 세계관이며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는 유치한 민족은 분명히 아니었다.

해방 이후 미국 문화의 무차별적 공습과 세례의 결과일까. 우리의 태극과 원융회통의 소통과 통합의 세계관은 어느새 미국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자리를 내준 듯하다. 할리우드에서 수입되는 단순한 이분법적 선악구도로 일관하는 수많은 ‘맨 시리즈’들의 흥행에 이어 이제 한국판 좀비물의 선구자 ‘부산행’도 가볍게 1000만 관객 고지를 밟는다.

‘부산행’ 흥행을 접하는 마음이 썩 개운치만은 않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할리우드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동화돼 가는 것은 아닐까. 좀비와 비좀비만이 존재하는 부산행 KTX의 좁은 공간처럼 사회 곳곳에서 ‘우리’와 ‘그들’을 나눠 서로 ‘우리’가 아닌 ‘그들’을 어둠의 자식들로 이름 붙여 사생결단 막아서거나 무자비하게 물어뜯는다. 가두街頭에서 증오에 찬 얼굴로 투쟁적인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태극기의 태극문양이 민망한 오늘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