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지위와 ‘처녀성’의 가치
곽대희 性코너
20세기 말 「킨제이 리포트」의 출간을 계기로 저마다 숨겨왔던 은밀한 사생활이 세상에 폭로됐다. 이 사건은 섹스에 대한 금단적(禁斷的)이면서도 강한 배척의 정서가 순식간에 붕괴되는 하나의 혁명과도 같았다. 당시 목숨을 걸고 굳게 지켜오던 섹스에 대한 규율도 와르르 무너졌다.
대중으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던 사회적 저명인사들의 치부가 드러났고 이러한 도덕적 붕괴는 일반 대중의 정제된 성생활에 ‘금단’의 사슬을 푸는데 한몫 했다. 일종의 모방 행위가 유행처럼 번져간 것이다.
당시 ‘프리섹스’의 풍조가 몰고 오는 도덕적 몰락을 두려워한 종교계 인사들은 주일 예배를 통해 ‘성은 비매품’이라고 설교하며 대중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들은 간음이 ‘최악의 죄악’이라는 성서의 교시를 따를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생활은 자유로운 것이고 당사자 간 합의만 있다면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체 무슨 말이냐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생활은 한때 자유로움의 방증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때 유럽의 사원(寺院)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이 저자를 이뤘다는 깜짝 놀랄 기록이 남아 있다.
창기들이 아니라 양가의 주부들이 일종의 종교의식의 형태로 지금의 노점상처럼 길거리에 줄지어 앉아 남자들의 호객에 응하던 ‘퇴폐적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사원매춘(寺院賣春)’의 시대였다. 매춘으로 번 돈은 고스란히 사원에 헌납해 교회 재정으로 충당했던 초기의 합법적 매춘은 시간이 흘러가며 사기업(私企業)으로 변화하고 이는 매춘업이 됐다.
우리나라도 고려왕조 말, 사원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남녀간의 통정이 이루어졌던 적이 있었다. 이 부패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의 여러가지 명분 중의 하나였다는 설도 있다. 위화도 회군 이후 펼쳐진 유교적 강령을 통한 강력한 욕구 규제 정책으로 '남녀 통정'은 반윤리적 행위로 낙인이 찍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숨막히는 통제의 영향으로 강간이나 연애 실패로 동정을 상실한 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비밀리에 거래되어 온 매춘은 한국동란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타고 수요가 늘어났고, 경제 성장과 더불어 그 수요는 대폭 증대됐다. 하지만 외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유럽의 강국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 파리의 번화가를 밤에 산책하면 적어도 수백 명의 멋진 창녀들에게 유혹을 받는다. 전쟁으로 국가 통치력이 붕괴된 것도 아닌데, 프랑스인들은 지갑에 돈이 떨어지면 매춘한다는 생각들이 젊은 여인들의 두뇌 속을 꽉 채워 넣고 있다.
여성의 취업률이 남자를 상회하는 지금의 경제 현황이 지속되는 한, 한국여성들의 혼외정사는 한결 부담스러운 모험이 아니다. 파경을 맞이하면 다시 시집가면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게 지금의 세태다. 게다가 실업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그만큼 남녀의 만혼(晩婚)이 늘어가고, 그 연령에서 분출되는 성적 충동을 견디지 못하는 청춘남녀 사이에 엔조이를 겨냥한 프리섹스를 거부할 수 없게 사회 분위기가 변해버린 것도 문제다.
외도는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되어 가고, 일부 처녀들은 원조교제라는 형태로 성을 판매하고 거기에서 부(富)를 얻기도 한다. 그런 다음 결혼해서 가정을 꾸미더라도 별로 겁낼 것은 없다는 풍조도 생겼다. 여성들에게 ‘미련하게 성적 충동을 참고 살기 보다는, 기회가 있을 때 즐기겠다’는 용기를 부어준 것은 여성의 지위가 그전보다 확고해진 우리의 경제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여성을 압박하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정결해야 하고,성생활을 만끽하면 안 된다는 유교적 가치관에 손을 드는 이가 ‘프리섹스’쪽 보다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