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가 곧 운명이다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관상 ❸
2016-01-27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김내경은 외아들 진혁(이종석)의 상相이 역모에 연루돼 가문을 닫게 만든 조부祖父의 상을 닮아 벼슬길에 나가면 또다시 변고를 당하리라 예언한다. 기생 연홍이 던져주고 간 돈으로 오랜만에 아들, 처남(조정석)과 삼계탕 회식을 즐기던 중 글공부를 단념치 않는 아들의 뺨을 냅다 갈긴다. 아들의 얼굴에 나타난 두려운 운명을 믿어서다. 그러나 진혁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가출, 호적을 위조해가면서까지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김내경은 운명론을 접고 진혁의 의지론을 믿어보기로 한다.
김내경이 문종文宗과 나눈 대화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김종서의 천거로 사헌부 관리가 된 김내경이 문종에게 불려갔을 때 그는 자신의 관상이론을 설파한다. ‘얼굴 생김과 몸놀림, 입놀림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개개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열에 아홉은 알 수 있다’고 자신한다. 거의 신전神殿 분위기를 풍기는 근정전, 신과 같은 왕 앞에서 말이다.
‘열에 아홉을 맞힐 수 있다’면 확률은 90%로 대단히 높다. 하지만 항상 나머지 10%가 문제다. 예외 없는 법칙이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각지대는 항상 존재한다. ‘필요충분조건’이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론 불가능하다. 관상학 역시 마찬가지다. 90% 확률의 관상학 ‘일반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10%는 결국 인간 의지의 영역으로 남은 ‘특수론’인 셈이다.
김내경도 이것을 인정한다. 관상학적으로 아들 진혁이 글을 읽어 벼슬길에 나서면 자신의 조부처럼 변고를 당할 확률이 90%라고 믿지만, 진혁이 관리의 길에 들어서자 10%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 본 거다. 김내경이 말로만 듣던 수양의 얼굴을 처음으로 대했을 때도 그렇다. 김내경은 수양의 얼굴을 보며 ‘이리와 같은 상, 역적의 상’이라 확신한다.
기이한 점은 김내경이 수양의 상이 ‘왕이 될 상’인지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오직 ‘역적의 상’인지 아닌지에만 집중한다는 거다. 수양의 얼굴에서 왕이 될 ‘운명’을 읽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이 되고자 하는 무시무시한 ‘의지’만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운명론자여야 할 관상가 김내경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엉뚱하게도 ‘의지’였던 셈이다. 최고의 관상가임을 자처하면서도 관상가답지 않게 수양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관상이 대표하는 ‘운명론’은 홀연히 사라지고 두 개의 의지가 부딪치며 피바람을 일으킨다.
영화 ‘관상’에서 운명론을 바라보는 한재림 감독의 입장은 분명해 보인다. 운명이란 별것이 아니다. 의지가 곧 운명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사회’라거나 ‘금수저, 흙수저 계급론’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특수론도 여전히 존재한다. 반대로 흙수저 물고 태어난 이들이 금수저를 물고 회전의자에 앉아 급식소 재정에 일조하기도 한다.
결국 운명이 90%, 의지가 10%라는 게 김내경의 지론이라면 ‘금수저 계급론’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의 영역도 10% 정도는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라는 게 한재림 감독의 메시지는 아닐까. 하지만 이런 시각에 동의하기 어려운 일부관객층의 이탈로 영화 ‘관상’이 1000만 관객 고지 점령에 실패, 아쉽게 900만명에 머물렀는지도 모르겠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 더스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