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 운명을 비웃다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관상 ❷

2016-01-19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영화 ‘관상’은 익히 알려진 결말을 보여준다. 수양대군(이정재)은 단종 1년(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자신의 쿠데타를 ‘나라의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한다’는 정난靖難이라는 말로 포장해 무력을 동원한다. 곧이어 단종의 명령이라고 속여 중신들을 경복궁으로 호출, 그 유명한 살생부를 펼쳐들고 궐문闕門에 들어서는 중신들을 척살하고 국권을 한 손에 장악한다.

수양은 자신을 거부한 하급관리들을 굴비 엮듯 엮어 광화문 밖으로 끌고 나온다. 사헌부 관리로 일하던 김내경(송강호)의 아들 진형(이종석)도 섞여 있다. 김내경의 눈물겨운 탄원에도 수양은 진형의 심장에 화살을 박는다. 울부짖는 김내경을 뒤로하고 수양은 김내경을 비웃는다. “저자는 자기 아들이 저리 절명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나는 몰랐네만….”

수양은 결정론(determinism)이나 운명론(fatalism)을 그렇게 조롱한다. 세상의 이치를 인과因果관계의 연속된 결과라 믿는다면(결정론) 수많은 충신을 때려죽이고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어린 조카의 목숨까지 거두기는 어렵다. 그 악업에 반드시 따라올 ‘예정된 결과’가 두렵기 때문이다. 운명론을 믿었다면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수양은 이미 왕이 될 꿈을 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수양의 세계관은 의지론(voluntarism)에 가깝다. 수양에게 운명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든 자율적인 의지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김내경을 포함한 당대의 관상가, 역술가를 대하는 수양의 태도는 진지하지 않다. 제1의 정적 김종서(백윤식)가 특별 영입한 당대 최고의 관상가라는 김내경을 처음 대하는 자리에서 수양은 자신의 관상을 보아달라고 하면서도 얼굴에는 조롱기가 가득하다. 수양이 세상에 세勢를 과시하기 위해 벌인 연회에 당대의 관상가들이 참석해 앞다투어 수양을 ‘왕의 상’이라고 치켜세울 때도 그의 냉소는 계속된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던 수양은 병약病弱하고 문약文弱한 형 문종文宗에 비해 문무를 모두 겸비한 야망가였다. 세종은 운명론을 가벼이 여기고 인간의 의지를 믿는 둘째 아들이 미심쩍었던 듯하다. 둘째 아들에게 ‘수양대군首陽大君’이란 의미심장한 군호를 내린 걸 봐도 그렇다.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먹다 굶어 죽을 때까지 충절을 지킨 백이와 숙제처럼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주문呪文을 건 셈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됐는지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손(단종)의 보위를 지키라는 교시까지 남긴다. 병약한 문종이 오래 살 것 같지 않고, 어린 세손이 왕위에 오를 것까지 예견한 모양이다. 수양의 야심을 가두는 이중의 잠금장치를 한 셈이다. 하지만 낭중지추처럼 수양의 무서운 권력의지는 이중의 봉인을 어렵지 않게 해제하고 왕위에 오른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의 아침, 국권을 틀어쥔 수양이 광화문 앞에서 아들의 목숨을 애원하는 김내경과 조우했을 때, 수양은 김내경에게 다시 자신의 상相을 봐줄 것을 청한다. 수양은 그제야 그의 상을 왕상이라 판정하고 조아리는 김내경을 조롱한다. ‘관상 값’을 치르겠다며 김내경의 아들 심장에 화살을 쏘고는 이렇게 말한다. “네 죄는 죽어 마땅하나, 네 공이 커서 살려준다.”

김종서의 일급책사로 활약한 김내경이 사면을 받을 만큼 수양의 집권을 위해 세운 ‘혁혁한 공’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수양의 거병擧兵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 없는 거병은 역모다. 그런데 김내경은 “수양의 상이 역모의 상에 틀림없다”면서 김종서와 어린 단종이 위기감을 갖게 한다. 이들이 수양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는 데 김내경이 사실상 역할을 한 것이다.

결국 김종서가 먼저 군사반란을 일으킨 모양새가 됐고, 수양은 반란진압의 명분을 확보했다. 수양이 일으킨 정변의 명칭이 계유정난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운명론을 교묘하게 이용했을 뿐, 수양은 시종일관 운명론을 거부했다. 수양의 ‘의지론’이 ‘운명론’에 완승을 거둔 셈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 더스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