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해… 모함… 영웅을 물고 뜯다
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90)
2015-12-04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이순신은 권율의 명령을 받들어 가등청정을 잡기 위해 간첩 ‘요시라’가 지정한 곳으로 함대를 몰고 갔다. 하지만 요시라는 순신의 진중에는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권율, 김응서의 진은 별 볼일 없었지만 이순신의 진은 달랐기 때문이다. 섣불리 갔다가는 군문에 효수되기를 면치 못할 것을 요시라도 알았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소서행장은 또 잔꾀를 내었다. “가등청정이 조선 땅에 상륙했다. 그런데 이순신이 가덕도까지 와서 가등청정을 사로잡지 아니하고 일부러 놓아 주었다. 이순신에게 뇌물과 폐백을 많이 보냈다.” 김응서는 요시라의 말을 믿고 대구에 있는 권율에게 보고했다. 권율 역시 그 말을 믿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모해하였다.
당연히 조정에 난리가 났다. “이순신을 베어야 한다”는 상소가 하루에도 3~4차례씩 일어났다. 윤두수는 순신의 죄명을 망상요공지죄(임금을 기망하고 공을 얻으려는 죄)라면서 상소했고, 윤근수는 종적해국지죄(적을 따라 나라를 해치려는 죄)라고 몰아세웠다. 그중 박성朴惺이란 자의 상소가 가장 기막혔다. “적장 가등청정의 뇌물을 받고 순신 같은 용략으로 능히 잡을 수 있는 가등청정을 놓아 주었은즉 이는 매국의 죄이니 처참하소서.”
유성룡과 이순신의 공명을 시기하는 서인과 북당은 사건의 유무와 이유의 허실곡직도 모르고 전부가 떠들고 일어났다. 비유컨대 개 한 마리가 짖음에 여러 개들이 함께 짖음이요, 닭 한 마리가 우니 여러 닭들이 함께 우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경림군 김명원만은 “이순신은 정대한 사람이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의정 이원익은 선조의 앞에서 역설 변명하되 한산도에 갔을 때에 본 것을 들어 순신의 충성을 증명하였다. 첫째로 순신이 검소하고 사졸과 고락을 함께하는 것, 둘째로 군법이 엄숙하고 군령이 간명한 것, 셋째로 군민이 모두 순신을 부모처럼 따르는 것, 넷째로 청렴 개결하여 진중에 한 여자가 없는 것.
일본의 잔꾀에 넘어간 조정
이원익의 말을 들은 선조는 순신의 충성을 짐작했다. 하지만 좌우 제신이 순신의 죄상을 적발하므로 성균관 사성司成 남이신南以信을 한산도로 암행어사를 보내 그 내정을 염탐하여 오기를 명하였다. 선조가 성균관 사성을 암행어사로 선택한 건 사성은 정치에 관계가 없는 대학교 교수 격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당파관념에서 초월한 한학자를 보내려 했던 거였다.
하지만 남이신은 공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정의 경알(다투고 삐걱거림)이 심하다는 말을 들은 백성과 군인들은 암행어사에게 이순신은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으며 성충 보국하고 있다는 사실을 호소하면서 설명했다. 그런데 남이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남이신의 마음에는 이순신을 모함해 벼슬이나 차지하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산도에 들렀지만 순신을 아예 보지도 않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남이신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은 이랬다. “적장 가등청정이 병선 한 척만을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다가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조그마한 절해고도에서 7일 동안이나 있었다. 소서행장은 곧 요시라를 이순신에게 보내 가등청정을 사로잡기를 독촉하였으나 순신은 가등청정의 뇌물을 받고 요시라의 말을 불청하였다.”
남이신의 이 보고를 들은 조정 대신들은 “허튼소리로 임금을 속였다”는 죄로 이순신을 잡아들이기를 명하였다. 원균과 이일의 무리는 더욱 기회를 타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되 순신이 100만명의 유민과 천척의 병선을 갖추고 삼도의 해왕 노릇을 할 야심을 품었다고 하였다.
이제 이순신을 잡아오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게 큰 걱정거리였다. 당시 호랑이떼와 같은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 일본 장수도 못 당해내는 이순신을 어떻게 잡아오느냐가 문제가 됐던 거다. 그러나 당쟁의 우두머리인 정철, 유홍 두 사람은 이순신을 잡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 순신의 충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왕명이라 하면 두말없이 잡혀 올 것을 믿었던 거다.
그래서 조정은 10여인의 건장한 나졸만을 금부도사에게 붙여 한산도로 내려갔다. 1월 25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잡으려 왔다는 말을 들은 사졸과 백성들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순신은 그 자리에 없었다. 권율의 장령을 받아 가등청정을 잡으려고 가덕도에 진군하고 가등청정이 오는 배를 정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신의 충성 왜곡하는 조정
금부관원들은 배를 타고 가덕도 진중으로 가서 어명을 전하고 즉석에서 이순신을 결박하였다. 군사ㆍ백성의 곡성이 산과 바다에 진동하였다. 조정 간신들이 이순신 장군을 시기해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며 금부도사 앞에 애원하며 등장(여러 사람이 함께 관청에 올리는 소장이나 청원서)을 들였다. “이 경관(서울에서 온 관리)들을 다 죽여라, 이 간신놈들!”이라고 폭언을 하는 군사도 있었다.
처음에는 매우 거만하던 금부관원들도 군민들이 이렇게 분개하여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겁이 나서 순신의 앞에서 “대감, 이것 큰일 났소”라며 벌벌 떨었다. 순신은 우후 이몽구, 거제현령 안위 등 제장을 불러 울분에 찬 군사와 백성을 진정시키라고 명하였다. 군사들은 군령을 지켜 잠잠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아무 죄 없이 항쇄(죄인의 목에 채우는 형구)를 차고 상투와 옷고름을 풀어헤친 모양을 본 백성들은 울분을 토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