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으신 양반의 한마디에 산업계 “술렁”

정부 주도 구조조정 시작됐나

2015-10-21     김정덕 기자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도 초비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한계기업은 구조조정 돼야 한다’는 말 한마디에 ‘산업 구조조정’이 갑작스레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실기업은 시장에서 퇴출하는 게 옳다. 하지만 여태껏 가만히 있다가 ‘높으신 양반들’의 한마디에 산업계 전체가 휘청거리는 게 옳은지는 의문이다. 

“한계기업의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지난 7일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내뱉은 말이다. 국민경제자문회의가 보고서를 통해 “중국의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주력산업(조선ㆍ철강ㆍ석유화학)의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나온 발언이다.

그러자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튿날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10월 말까지 은행들이 한계기업을 정리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뒤이어 금융위원회는 13일 ‘기업 구조조정 추진 방향’을 발표했다. 올 11~12월 대기업을 대상으로 수시 신용위험평가를 추가로 실시, 한계기업을 솎아 낸다는 게 주요 골자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한계기업 구조조정이 순식간에 진행된 셈이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지난 5월 산업 구조조정을 거론했다. 자진해서 사업구조를 재편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주는 ‘사업재편지원특별법(가칭)’의 필요성을 강조한 거다.[※ 참고: 지난 7월 이현재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기업활력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이 바로 사업재편지원특별법이다.]

곧바로 조선업계 내부에서는 삼성중공업이 성동조선해양을, 현대중공업이 STX조선해양을 위탁경영하거나 합병할 것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대우조선해양을 누가 가져가느냐 하는 전망도 공공연하게 나왔다. 실제로 8월 31일 삼성중공업이 수출입은행과 성동조선해양 경영정상화 지원을 위한 경영협력 협약을 맺고 위탁경영을 결정하면서 이런 설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조선업계는 “가뜩이나 어려운 삼성중공업이 자진해서 위탁경영 결정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면서 “성동조선해양보다 재무구조와 수익성이 훨씬 열악한 STX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산업부는 STX조선해양의 위탁경영은 계획한 바 없다며 공식 부인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윤 장관은 9월 2일 출입기자들과의 대화에서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정유, 조선 등 5개 산업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번엔 철강업계가 술렁였다. 10월 초 산업부가 철강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포스코에 대우인터내셔널과 비철강 사업들을 매각하도록 권고하는 ‘철강산업 사업재편 기본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기사가 흘러나왔다. 산업부는 이 역시 공식 부인했다.

최경환 발언에 은행업계 ‘부르르’

지난 10일에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오후 4시면 문을 닫는 금융은 지구상에 어디에도 없다”면서 “금융개혁이 기대에 많이 못 미친다”고 말했다. 그는 “구조조정에 정부가 적극적인 중재자로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금융권에 구조조정의 운을 떼면서 구조조정을 ‘정부가 주도하겠다’는 속내를 밝힌 것이나 같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즉각 “은행 실제 업무가 오후 4시 이후에 시작한다는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며 발끈했다. 하지만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13일 기자들과 만나 “변형근로시간제 확대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눈치를 본 셈이다.

수익을 못 내고 은행 빚에 기대 연명하는 한계기업은 퇴출하는 게 옳다. 정부가 조언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문제는 현재 구조조정 작업이 정부 주도로 진행될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다. 정부기관 한마디에 산업계가 전전긍긍하는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정부는 “자율에 맡기고 유도만 할 뿐”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산업계는 “구조조정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을 우려해서다. 한국철강협회 강관협의회 회장인 엄정근 하이스틸 사장이 지난 14일 열린 강관산업발전 세미나에서 “국내 강관산업은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 저가 수입재로 인한 내수시장 악화 등 어려움에 직면했다”면서 “업계 스스로 비효율 사업을 정리하고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수영 롯데케미칼 사장도 15일 우즈베키스탄 수르길 프로젝트 기자간담회에서 “구조조정은 업계 간 자율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정부는 이를 위한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조원동 중앙대 석좌교수조차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우려의 근거는 크게 네 가지다. 먼저 우량기업이 부실기업을 떠안을 수 있다. 실제로 이미 삼성중공업의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데 성동조선해양이라는 부실기업 하나를 떠안게 됐다. 둘째는 특정 대기업이 특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는 신용평가가 한계기업을 솎아 내는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느냐는 거다. 신용평가가 현재의 재무구조 상태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장잠재력이 있는 기업이나 사업이 제대로 평가받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속도전 양상으로 끌고 갈 경우 구조조정에 따른 대규모 실업 사태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후폭풍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도 고려되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대규모 실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지만 스스로 내놓은 해법은 ‘의료ㆍ관광산업 활성화를 통한 청년고용’밖에 없다. ‘부모 월급 빼앗아 자식 주겠다’는 임금피크제와 똑같은 논리다. 노동계가 결코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국론을 모으자고 해 놓고 국정교과서 밀어붙이기를 통해 불필요한 논란거리만 만들더니 산업계에서 또 다른 논란거리를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산업계 정부 눈치 보느라 진땀

정부의 산업 구조조정 행보에 대해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 논리에 누가 먼저 나서서 ‘받들어 총’을 외치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늘 그렇게 해 온 것처럼 정부가 주도해서 잘된 적이 있는가. 말이 자율이지 사실상 강제 아닌가. 더구나 기업들은 제대로 계산할 시간도 없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가 스타일대로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가는 결국 실패할 거라는 조언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