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쥐면 쥘 수 없나니…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와호장룡 ❸

2015-07-21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리무바이(주윤발 분)와 용(장쯔이 분)의 대결이 시작된 지 몇합 지나지 않아 용의 무공은 리무바이의 무공에 비해 턱없이 부족함이 명백해진다. 용이 ‘용을 쓰며’ 흔들어대는 대나무 가지 끝에 선 리무바이는 흔들림 없이 뒷짐을 진 채 부처님 같은 대자대비한(자애롭고도 상대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은 슬픈) 미소를 짓는다. ‘미국 람보’ 실베스터 스탤론은 흉내 내지 못할 대단한 표정연기를 ‘홍콩의 람보’ 주윤발은 해낸다. 그 ‘대자대비한 미소’ 연기 하나로 주윤발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어도 크게 부당하지 않았으리라고 느껴질 만큼 참으로 오묘한 미소로 기억된다.

용이 청명검을 겨누며 돌진해도 리무바이는 여전히 한손을 뒷짐 진 채 다른 한손으로 막아내기만 한다. 미소는 거두지 않는다. 상대의 크기와 자신의 바닥을 본 용은 참담해진다. 용은 리무바이의 처분을 기다리지만 리무바이는 용을 응징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문하에 들어올 것을 제안한다. 제안이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깝다. 용은 다시 오기가 발동한다. 용이 제안을 거절하자 리무바이는 “그렇다면 청명검은 너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과 함께 용에게서 빼앗은 청명검을 강물 속에 집어던진다.

용은 그 청명검을 쫓아 강물에 뛰어들고 푸른여우가 용을 구출해 달아난다. 리무바이와 용의 대결 후 슈리엔(양자경 분)이 리무바이에게 “왜 용이 청명검을 도로 가져가도록 놔두었느냐”고 따진다. 그러자 리무바이는 지극히 철학적인 명제를 동원해 슈리엔을 설득한다. “용을 저대로 놓아두면 독을 품은 용이 될 것이다. 나의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청명검은 허상일 뿐이다. 주먹을 쥐면 손안에 아무것도 쥘 수 없지만 손을 열면 모든 것을 잡을 수 있다.”

이 물음과 대답에 영화 ‘와호장룡(혹은 소설 「와호장룡」)’이 전달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가 담겨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번 잡았다가 놓아주면서 스스로 굽혀 들어오기를 기다린 것과 같은 이치다. 무림을 제패하고 득도의 경지를 향해 정진한 리무바이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었다. 도전자인 용에 대한 리무바이의 해법을 정리하면 결국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이다. 도전자를 제압하는 건 무력이 아니라 도전자가 나를 마음으로부터 승복하게 만드는 거다. 주먹을 쥐어 두들기는 게 아니라 열린 손으로 손을 잡아줘야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무력이나 권력(청명검)은 무의미하다.

사실 리무바이의 사부 강남학의 무공 역시 강호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독을 품은’ 여제자 푸른여우의 독침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 강남학은 푸른여우와 살을 섞고도 무당심결의 진수를 푸른여우에게 전수하지 않아 푸른여우로부터 원한(독)을 샀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리무바이 역시 용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의 승복’을 받아냈지만, 푸른여우의 독침을 맞고 숨을 거둔다. 리무바이의 초절정 무공도 독침 앞에는 무의미하다.

리무바이는 용에게 자신의 문하에 들어와 세상에 대한 존중과 이해부터 터득할 것을 종용하지만 용이 거부하자 “그렇다면 너에게 청명검을 줄 수 없다”고 한다. 세상(기존 질서)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 청명검이 상징하는 무력(권력 혹은 한 시대)을 넘길 수 없다는 뜻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