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껄 웃어라, 죽고 싶다면 …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장미의 이름 ❷
2015-05-15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호르헤 신부와 윌리엄 신부는 각각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세력과 그 세력에 반기를 드는 세력을 대표한다. 두 세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나오는 ‘웃음’이라는 문제를 놓고 충돌을 벌인다. 기존 교회세력을 대표하는 베네딕트파는 자신들이 해석한 신의 가르침에 대해 인간의 재해석과 문제제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식사시간에 베네딕트 수도사는 “묻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 웃지도 말라”는 구호 같은 기도를 읊조린다. 웃음은 경건한 수도사에겐 적절하지 않았다. 웃음이 경박하고 천하다고 여겨서다.
사실 당시 사회질서에서 ‘웃음’은 중대한 문제였다. 중세 신앙과 교회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사회질서의 생산자로 현실세계를 통제하는 사회 권력이었다. 웃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기존 교회 세력인 베네딕트파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프란시스코파에 패배하는 것과 같았다. 양자 간의 권력투쟁이 물리력이 아닌 철학과 논리로 나타났을 뿐이다. 사소한 웃음의 문제에 사생결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베네딕트파와 호르헤 신부는 “품위가 떨어진다” “웃는 인간의 얼굴은 원숭이를 닮는다”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등 온갖 억지 논리를 편다. 그는 다른 수도사가 웃음을 탐닉하는 것을 막기 위해 「희극론」 모서리에 독약을 묻혀가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권력 유지를 위해 신앙과 교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배척한 거다. 그 속에서 윌리엄은 중세로부터 근대로 진입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윌리엄 오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근대 철학의 중심에는 데카르트가 있었고,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했다. 인간 이성의 회복을 선언한 말이다. 신이 독점한 진리에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연 명제다. 이런 사상은 칸트, 헤겔 등에 의해 계승됐다. 니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며 보편타당한 진리를 부정한다. 니체는 “진리는 환상에 불과하다”며 “단지 진리의지만 존재한다”고 탄식한다. 자신의 거짓진리를 다른 거짓진리로부터 지키기 위해 투쟁하려 하는 의지만 존재한다는 냉소다. 아마도 에코는 소설에서 이런 니체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메신저로 앗소를 택한 듯하다.
호르헤 신부는 니체의 냉소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합리주의에 치를 떤다.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거짓된 지식으로부터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에 충만한 인물이다. 그는 이 ‘진리의지’를 ‘진리’라 착각하며, ‘거짓진리’에 노출된 수도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결국엔 자신이 믿는 ‘진리’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논거를 제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의 「희극론」과 함께 자신을 불살라 버린다. 무서운 진리의지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