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공약은 죽었고 유리지갑은 털렸다
증세 없는 복지 허구論
2015-02-25 김정덕 기자
‘증세 없는 복지’. 이 말이 또 논란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를 한답시고 증세를 운운하는 건’ 무책임한 말이라고 쏘아붙였다. 증세 없이도 복지를 실현할 방법은 많다는 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박 대통령의 복지공약은 한낱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유리지갑 서민들은 늘어난 세금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더스쿠프가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를 교육 중심으로 살펴봤다. 합리적 재원마련 방법도 짚었다.
박 대통령은 공약집을 통해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실천하겠다” “인간다운 삶의 최저수준을 보장하는 복지사업은 전적으로 중앙정부가 담당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 당선 이후 “증세를 하지 않으면 복지재원 마련이 어렵다”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쏟아지자 “국민 부담을 늘리지 않겠다” “세입을 확충하더라도 세율인상이나 세목신설보다는 세금을 제대로 걷는 데 집중하겠다”고 맞받아쳐왔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증세 없는 복지론’을 이제 와서 모른 척하려는 이유는 뭘까. 곳곳에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세율인상이나 세목신설 같은 증세’는 하지 않았지만 세법개정과 간접세 인상을 통해 국민 부담은 늘었고, 복지를 했지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공약을 헤집을 필요도 없다. 교육 관련 복지 공약이 어떻게 됐는지만 봐도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를 쉽게 엿볼 수 있다.
박 대통령 공약집 272쪽에는 ‘보육 및 유아교육 국가완전책임제 실현’이라는 커다란 문구가 있다. 여기서 국가란 중앙정부다. 하지만 무상보육을 책임지고 있는 곳은 지자체(0~2살)와 교육청(3~5살 누리과정)이다. 공약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했는데, 재원마련의 책임은 지자체와 교육청에 떠맡긴 거다.
2013년 3월 무상보육이 시행되면서 중앙정부는 지자체에 0~2살의 무상보육 재원의 상당부분을 부담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서울시의 25개 구청장들이 “국회와 정부가 열악한 지방정부의 재정여건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영유아 무상보육 재원 부담을 지방정부에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0~2살의 무상보육 재원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게 됐다. 박근혜 정부는 한술 더떠 예산도 줄였다. 2015년 ‘3~5살 누리과정’ 예산 2조2000억원을 전액 삭감하고, 책임을 시ㆍ도교육청에 떠넘긴 것이다.
돌려막기 한계 다다른 무상보육
교육청의 무상급식비를 줄여 무상보육에 쓰라는 게 정부 논리였다. “큰 애 밥값 줄여서 동생 어린이집 보내라는 말이냐”는 여론이 불거진 건 이 때문이었다. 현재 교육청들은 유치원 예산 등을 어린이집 보육료로 긴급 전환해 편성했지만 아직 결론은 나지 않은 상황이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약속했던 방과후학교와 돌봄교실 역시 모든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예산을 교육청과 학교에 떠맡기고 있다. 교육부가 지난해 초등학교 돌봄교실 예산으로 6600억원을 신청했지만 기획재정부는 전액 삭감했다.
더구나 최근 새누리당이 무상보육을 마치 인천 어린이집 아동 폭행의 원흉이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어 무상보육제도의 존립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3조1000억원의 재정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투입해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실현하겠다던 공약은 소리 없이 폐기됐다. 공약집에는 2014년부터 고교무상교육을 매년 25%씩 확대해 2017년에는 전면 무상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돼 있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관련 예산이 전혀 편성되지 않았다.
교육부는 당초 고교 무상교육 관련 예산 2420억원을 편성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획재정부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서 충당하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방교육재정교부금도 지난해보다 1조3475억원 줄어든 상황이어서 예산 편성이 쉽지 않다. 사실상 고교 무상교육을 포기한 셈이다. 중기재정운용계획 분야별 투자방향에도 고교 무상교육 얘기는 없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고등학교 무상교육 공약을 포기한 건 아니다”며 “향후 교육교부금 상황에 따라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상보육 예산도 지자체와 교육청에 떠맡긴 상황에서 고교 무상교육 예산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값등록금은 2011년 대학생들이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비싼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다”며 촛불시위에 나서면서 이슈가 됐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대선공약에 반값등록금을 집어넣었다. 소득에 따른 차등지원이 골자였다. 그렇게 시작한 반값등록금, 성과는 있었을까.
1월 5일, 교육부는 박 대통령의 공약이던 ‘반값등록금’ 공약을 완성하기 위한 ‘2015년 국가장학금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반값등록금의 성과를 간단히 정리했다.
논리는 이렇다. “한해 대학등록금 총액은 약 14조원(2011년 기준)이다. 올해 정부가 지원하는 국가장학금(근로장학금과 희망사다리장학금 포함)이 3조9000억원, 대학 측이 부담하는 장학금 3조1000억원이다. 총 7조원이 지원되는 셈이다. 정확히 반값등록금이 실현된다. 수혜 학생과 1인당 평균 지원액은 2012년 103만명(169만원)에서 2014년 122만명(273만원), 올해 125만명(288만원)으로 늘어났다.” 박 대통령은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1월 12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올해 반값등록금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등록금이 반으로 줄어든 만큼 여기저기서 혜택을 봤다는 학생들이 나올 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등록금 부담이 별로 줄어들지 않아서다. 대학들이 등록금을 올린 탓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윤관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년제 대학의 연평균 등록금은 637만5400원으로 2013년(626만7000원)보다 1.7%(10만8400원)가 올랐다. 학부 등록금을 못 올린 대학들은 대학원 등록금을 올렸다. 일부에선 법적 인상 한도인 2.4%까지 올렸다. 모두 2014년 물가상승률 1.3%를 웃도는 수준이다.
등록금을 대학이사회(설립자ㆍ소유주)가 맘대로 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수치상으로 ‘반값’을 지원하다보니 다른 결과가 나온 거다.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등록금 수준이 적정한지에 대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등록금 절반을 국가가 지급했기 때문”이라며 “현행 제도는 대학이 등록금을 높게 잡아 놓고 25%를 깎아주면서 이를 다시 국가가 지원하는 정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4조원에 가까운 돈을 대학 배를 불리는 데 썼다는 얘기다. 이상구 대표는 “등록금 부담이 줄어든다고 해도 생활비나 자취방 임대료, 어학원 등록비나 자격증 취득 비용과 같은 스펙 개발비 지출이 줄지 않으니 학생들은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멈출 수도, 공부할 시간이 늘어날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세금, ‘비정상의 정상화’ 필요
다른 공약들도 비슷하지만 모든 복지 공약은 돈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박 대통령이 공약을 내놨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재원마련 방법을 물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재원 마련 방법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공약들이 표류하고 있는 이유다.
최근 여당 안팎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증세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로 합리적으로 재원을 마련할 방법은 많다. 많이 깎아준 기업의 법인세를 올리고, 비과세ㆍ감면 혜택을 줄이면 된다. 기업의 존속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속세 감면 혜택을 줄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버는 만큼 내지 않는 ‘비정상적인’ 소득세를 ‘정상적’으로 내도록 강제하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있다. 직장인들은 이미 세법개정을 통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있다. 흡연자들도 오른 세금을 충실히 내고 있다. 더 많이 가진 이들과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합리적으로 징수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기득권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유리지갑을 만만히 보지 않는 것, 이게 복지의 시작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