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갈망, 표정을 지우다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쇼생크 탈출 ②
2014-12-02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레드는 앤디가 복역을 시작하기 이전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이미 30년을 복역 중인 쇼생크의 원로 죄수다. 다른 건 몰라도 교도소 내의 ‘삶의 방식’ 만은 완벽하게 터득했고, 그 과정에서 인생의 진리까지도 어느 정도 깨달은 ‘쇼생크의 현자賢者’다. 또 30년에 걸쳐 몸으로 터득한 교도소의 생리를 바탕으로 죄수들이 필요로 하는 온갖 ‘금지된 물품’을 언제든 구할 수 있는 장사꾼이기도 하다.
그런 레드에게 앤디는 조그만 장도리 하나를 부탁한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취미삼아 돌조각을 한다는 핑계를 댄다. 눈치 빠른 레드는 앤디의 핑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레드는 잠깐 고민하다 장도리 하나로 교도소 벽을 뚫기엔 현실적으로 600년이 걸릴 거라 판단해 장도리를 구해준다. 하지만 현실적 판단은 가끔 오류를 범한다. 인간은 때로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화하기도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도 한다.
앤디는 한 뼘 크기의 장도리 하나로 19년에 걸쳐 교도소 벽을 뚫는 ‘대역사’를 시작한다. 아흔살의 노인이 통행에 불편을 주는 동네 산을 옮기기 위해 흙을 한 삼태기씩 날랐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나 한 노파가 쇠몽둥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려 했다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의 중국 고사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19년에 걸친 벽 뚫기에서 앤디가 교도관과 펼치는 아슬아슬한 장면은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탈출에 성공한 이후 레드의 독백을 통해 회고 형식으로 그 집요한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극적인 탈출이 있기 전까지 영화는 앤디의 자유를 향한 ‘동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친다.
Sequence1 앤디, 옥상에서 미소 짓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앤디를 포함한 레드와 그의 친구들은 교도소 옥상에 타르칠을 하는 노역을 자원한다. 불볕더위 속에서 노역에 종사하던 앤디는 교도관들이 세금문제로 고민하는 대화를 엿듣고 자신의 금융지식을 동원해 고민을 해결해 준다. 그 대가로 앤디와 그 일당은 시원한 맥주를 두병씩 제공받는다. 그들은 옥상 위에서 마치 한적한 유원지 해변에서 시원한 맥주를 즐기듯 길게 누워 눈을 감고 달콤한 자유를 즐긴다. 그러나 앤디와 다른 죄수의 표정에 차이가 있다. 집요하게 벽 뚫기 공사를 진행 중인 앤디에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자유를 영원히 누릴 수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래서 앤디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반면 레드를 비롯한 다른 죄수들은 똑같이 시원한 맥주병을 들고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지만 미소가 없다. 짧은 자유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는 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도 없다.
Sequence2 세기의 연인에 열광하는 죄수들
어느 날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위한 영화가 상영된다. 1940년대 ‘세기의 연인’이던 리타 헤이워드 주연의 영화 ‘길다(Gilda)’가 조악한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벌써 몇 번씩이나 신물 나게 같은 영화를 봤던 죄수들은 심드렁하니 늘어져 있다. 그러나 리타 헤이워드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비치는 순간 자세를 바로하고 목을 길게 뽑는다. 교도소에는 환호성과 욕설이 터져 나오고 간간이 ‘앓는 소리’까지 요란스레 뒤섞인다.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는 죄수는 앤디가 유일하다. ‘쇼생크의 현자’ 레드조차도 리타 헤이워드의 매혹 앞에서는 정신을 빼앗긴다. 그런 레드에게 앤디는 리타 헤이워드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 반입을 부탁한다. 탈출을 위해 구멍낸 감방 벽을 가리기 위해 리타 헤이워드가 필요할 뿐이다.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허상’에는 관심이 없다.
Sequence3 피가로, 교도소를 조롱하다
교도소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된 앤디는 너무나 볼품없는 쇼생크 도서관의 장서를 확충하고자 여러 기관에 줄기차게 탄원서를 보낸다. 그로부터 6년 만에 자선단체의 기부도서들이 도착한다. 도서를 정리하던 앤디는 모차르트의 희가극 ‘피가로의 결혼’ 레코드를 발견하고 교도관이 자리를 비운 교도소 방송실에 잠입, 문을 잠그고 레코드를 얹는 ‘도발’을 감행한다. 교도관이 방송실 문을 부수고 진입하기까지 앤디는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옥상 위에서 맥주를 마시며 보였던 행복한 미소를 다시 보인다. ‘피가로의 결혼’은 하인 피가로가 그의 주인 알마비바 백작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앤디는 교도소가 그의 몸은 가두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희망까지 가두지는 못하는 교도소와 교도관들을 그렇게 조롱한다. 이런 도발로 앤디는 2주간의 독방생활이라는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자유를 향한 희망이 있어서다. 반면 운동장에서 노역을 하다 느닷없는 아리아의 선율에 일손을 멈춘 다른 죄수들은 그저 먹먹하다.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에 잠시 자유로움을 동경할 뿐, 그들에게 자유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두 마리의 꾀꼬리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듯한 아리아 이중창의 선율은 그들을 더욱 우울하게 할 뿐이다.
스티븐 킹의 원작 제목은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Rita Hayworth and Shaw sank Redemption)」이다. 영화에서 잠깐 등장하는 리타 헤이워드의 이미지를 소설 제목에 사용했을 만큼 리타 헤이워드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시원한 맥주’ ‘모차르트의 아리아’ ‘리타 헤이워드’로 상징되는 ‘자유’는 모든 쇼생크 죄수가 갈망했다. 그러나 앤디만이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고 냉정하게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실천했다. 노력이 있기에 희망이 있었고, 희망이 있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끝내 자유를 쟁취했다. 나머지 죄수들은 여전히 교도소 담장 안에서 리타 헤이워드를 갈망하며 참담한 교도소의 현실에서 자신을 위로할 뿐이다.
우리에게 ‘앤디의 미소’가 없는 이유
교도소장은 젊고 곱상한 앤디를 괴롭히는 호모죄수를 불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앤디를 특별 대우한다. 굳이 목숨 걸고 탈출하지 않아도 좋을 만한 ‘팔자 좋은’ 죄수 앤디의 집요한 탈출의지를 통해 자유를 향한 쇼생크의 죄수들이 자유를 갈망하듯, 모든 국민은 지금 정치ㆍ경제ㆍ사회 모든 부문의 개혁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 리타 헤이워드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과 같은 막연한 갈망은 아닐까. 우리가 정말 앤디처럼 개혁을 향한 작지만 현실적이고 실천적 노력을 집요하게 하고 있느냐는 얘기다.
앤디는 자유를 향해 19년간 매일 벽을 긁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공허한 리타 헤이워드의 이미지에 위로받거나 열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행복감을 느꼈다. 희망을 간직했기에 행복했다. 하지만 우리는 ‘개혁을 향한 탈출’을 갈망하지만 앤디가 지었던 흐뭇하고 행복한 미소는 없다. 그 이유가 개혁에 희망을 품을만한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다음호에 계속>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sahngwhe@kopo.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