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세상서 ‘패술’ 부리다
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⑮
수길의 주군 ‘직전신장’이 부하들에게 일격을 당해 자살했다. 신장의 명을 받고 전쟁터에 있던 수길은 곧바로 수습에 나섰는데, 수길의 한마디에 신장가문이 흔들거렸다. 수길은 직전신장 가문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조선과 명을 침략해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야욕도 커져갔다.
갑주를 점령한 직전신장은 종2위 우대신右大臣의 직위를 받았다. 그후 신장은 본원사 싸움터에 불교와 반대되는 천주각天主閣을 높이 지어 기독교를 신봉했다. 일본의 기독교가 이 시대부터 유행했다. 그만큼 신장의 위세는 대단했다. 장군 족리의소는 관서지방의 모리씨에게 의탁했다. 그는 월후의 상삼겸신을 선동해 각처의 제후를 규합하는 한편 송영씨와 일규에 가담한 승군의 잔당을 모았다. 그러자 세력이 관서로 집중되었다.
이를 염려한 직전신장은 수길을 정서대장征西大將으로 삼아 군사 3만을 주어 관서로 출정케 했다. 이른바 ‘정서군’의 출정이었다. 그때 신장은 자신의 넷째아들 수승秀勝(히데카쓰)은 수길의 양자로 주고 수길에게 “자네는 양자에게 장래 영토를 얼마나 물려줄 것인가”라고 웃으며 물었다. 이는 수길이 아직 아들이 없는 까닭이었다. 수길은 이렇게 답했다. “영토는 이제 사국과 구주를 다 차지한 다음 수륙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서 조선과 명을 칠 것이니 아직 작정할 수가 없습니다.” 신장은 수길의 엄청난 대답에 껄껄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서군을 이끌고 관서로 내려간 수길은 승군을 쳐 대파하고 섭진攝津(셋쓰)의 수령 황목촌중荒木村重(아라키 무라시게)과 비탄飛彈(히다)의 수령 영목중행鈴木重行(스즈키 시게유키)을 쳤다. 3년의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격전지는 고송高松(다카마쓰)성이었다. 직전신장이 희로姬路(히메지) 일대에 성을 쌓아 정서군의 근거지를 만들고 수길은 고송성을 포위했다.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이하 7곳에서 원군이 들어와 수길에 대항을 했다. 수길은 용왕龍王(류오)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수공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고송성의 수공은 수길의 일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싸움이었다. 수길은 역전力戰보다는 지전智戰을 쓰며 지리와 기후관계를 이용했다. 군사력 이상으로 천지 대자연의 힘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고송성의 수평선을 측량한 수길은 용왕산 고원지대로 진을 옮겼다. 그후 성밖에 물길을 파서 성밑으로 들어갔다. 5월 장마철에 대비한 전략이었다. 그 무렵, 모리휘원毛利輝元(모리 데루모토)은 5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송성을 구원하러 오고 있었다. 연일 장마비가 내린 탓에 겨우 고송땅에 당도하였다.
천하 먹겠다는 야욕 드러내는 수길
그러나 고송성은 벌써 수중에 잠겨 있었다. 모리휘원의 대군은 원괘猿掛(사루카케)산에 유진하고 고송성의 침수된 광경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수길은 고송성을 물속에 파묻고 원괘산의 모리휘원의 군대와 싸우면서 돌연히 직전신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병력이 넉넉해 싸울 만했음에도 그랬다. 모리씨가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관서 일대를 혼자 평정하면 신장의 부하들이 그 공을 시기할 뿐만 아니라 신장까지도 꺼려할 것 같았다. 그 전공을 신장과 나누기 위해 ‘구원’을 청한 거였다.
직전신장은 수길의 급보를 받고 자기의 아들 직전신충織田信忠(오다 노부타다)을 총대장으로 삼고 명지광수 세천충흥細川忠興(호소카와 다다오키) 등 다섯장군의 부대를 수길에게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본능사本能寺(혼노지)로 돌아와 밤을 지내고 있었다. 그때 청지기 삼란환森蘭丸(모리 란마루)이 쫓아 들어와 “명지광수가 반역했습니다!”고 외치고 창을 들고 앞을 서서 나갔다. 근시近侍 170여명도 놀라 일어섰다. 삼란환은 10인의 용맹을 합한 역사였다. 신장은 활을 들고 앉았다가 명지광수의 선봉이 들어오는 대로 쐈다. 하지만 이내 화살이 떨어져 칼을 들고 앉았는데 명지광수의 날랜 장수 안전병위安田兵衛(야스다 효에)가 신장의 앞에 나타나서 창을 던졌다.
이러는 동안 명지광수의 군사가 신장의 근시 300여명을 죽였다. 삼란환이 신장 앞에서 안전병위와 격투를 할 때 신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직전신장의 최후 향년은 49세였다. 명지광수는 반기를 들어 신장의 부하를 도살하였다. 총대장 직전신충도 할복자살하고 말았다. 광수가 배반한 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직전신장은 본원사에 불을 질러 승군 300여명을 태워버리는 참혹한 일을 저질렀다. 그후 정서군을 일으켜 황목촌중의 일족 800여명을 학살하는 등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다. 더구나 신장은 부하를 초개와 같이 대우하는 성질이었다. 부하들 가운데 신장에게 뺨을 맞은 이가 여럿 있을 정도였다.
이에 따라 명지광수는 반심을 품었다. 이번 기회에 족리 장군의 집을 중흥한다고 명분을 내세워 모리휘원의 내응을 받아 신장을 기습 살해한 것이었다. 용왕산에 있던 수길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회군해 명지광수를 토벌하려 했다. 그러자 명지광수는 경도에 있는 모리휘원의 군사를 부르고 각처 제후에게 응원을 청하였다. 하지만 수길의 신속한 용병에 광수는 대패하여 승룡사勝龍寺(쇼류지)로 달아났다. 수길은 숨 쉴 틈도 없이 야습을 했다. 명지광수는 또 산속으로 달아나 시종의 칼을 빌려 할복했다. 종자들도 순사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다. 명지광수의 3일천하가 평정되니 직전씨의 집 사속嗣續 문제가 일어나 기부성으로 유신遺臣들이 모여들었다.
반란 잠재운 수길의 ‘힘’
시전승가는 직전신장의 차남 직전신효織田信孝(노부타카)를, 수길은 맏손자인 삼법사三法師(산보시)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시전승가는 장자 신충이 죽었으니 차자 신효를 세우는 게 인격주의라고 하였다. 수길의 주장은 ‘종통주의’였다. 다른 유신들은 직전씨의 집 원로인 시전승가의 주장에 끌렸다. 수길이 밖으로 나와 단우오랑丹羽五郞(니와 고로)을 불러 회의장에 들여보냈다. 단우오랑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수길의 주장이 이 상황에 당연하오. 신장공이 생존하였을 때 적자의 부인이 태기가 있음을 아시고 만일에 생남하면 내 집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이 있었오. 적손을 세우는 것이 곧 신장의 유언을 받아 실행하는 길일 것이오!” 시전승가 역시 신장의 유언이라는 말에 머리를 숙였다. 수길이 다시 들어와 적손을 세우기로 정식 발표했다. 유신들이 다시는 입을 못 열게 한 뒤 적손인 삼법사를 세웠다. 시전승가는 광수를 칠 때도 수길에 뒤지고, 사속문제도 수길의 주장에 밀려서 뒤졌다 하여 분하고 억울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