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산하 법인의 영세기업 잡는 요구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 “고가장비 안 사면 제품인증 안 해줘”
2014-03-27 김건희 기자
경찰청 산하 사단법인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가 ‘미끄럼방지포장재’를 인증하는 과정에서 영세 제조업체에 고가의 시험설비를 구입하도록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한편에선 협회 측이 특정업체의 시험장비를 구입할 것을 강제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협회 측은 “품질제고와 업체의 편의성을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건설업체 A사 대표는 지방 소도시에서 20년 넘게 건설시공을 하고 있다. 이 회사의 주력상품은 ‘미끄럼방지포장재’다. 이 제품은 미끄럼의 저항력을 높이는 도로부속물이다. 자동차의 제동거리를 줄여 운전자의 안전운행을 돕는다. 어린이보호구역이나 건물 지하주차장에 설치된다. 건설경기가 좋았을 때 A사의 실적은 연매출 15억원에 달했다. 직원 모두 살 만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작된 건설경기침체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서다. 지난해 매출은 4억원으로 뚝 떨어졌고, 직원은 7명으로 줄었다. 이젠 입에 풀칠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A사 대표의 속을 태우는 건 침체만이 아니다. 거금을 주고 구입한 설비가 창고에 방치돼 골치가 아프다. A사 대표는 지난해 ‘미끄럼방지포장재 단체표준 표시인증’을 취득하기 위해 고가의 시험검사설비를 구입했다. 인증제도를 운영하는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는 “시험검사설비를 모두 구입해야만 인증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A사 대표는 협회가 요구한 설비 13가지를 4000여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인증을 취득하지 못하면 미끄럼방지포장재를 아예 팔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구입했다.
협회 “설비 갖춰야 제품품질 제고”
문제는 제법 큰돈을 주고 구입한 설비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설비를 다룰 수 있는 화학 분야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데, 영세업체인 A사로선 꿈도 못 꿀 일이다. 굳이 설비를 구입하지 않아도 관련 검사를 받을 대안도 있다. A사 대표는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의 인증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제조업체들은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고가의 시험검사설비를 구입하고 있다”며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제조업체들도 불만이 많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미끄럼방지포장재 제조업체는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가 제시하는 시험검사설비 13개를 구비해야 인증을 취득할 수 있다. 이 검사설비들은 미끄럼방지포장재가 규격에 합당한 제품인지 판단하는 데 사용된다. 문제는 협회가 요구하는 시험검사설비의 비용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점이다. 더스쿠프의 취재 결과, 미끄럼방지포장재 제조업체들은 시험검사설비 구입명목으로 수천만원을 지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A사는 시험검사설비를 구입하는 데 4070만원(이상 부가세 포함)을 지출했고, B사와 C사는 각각 3680만원, 2150만원을 사용했다.
하지만 제조업체로선 고가의 시험검사설비를 구입하지 않아도 인증을 취득할 수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에 따르면 제조업체가 자체적으로 시험검사설비를 구비하지 않은 경우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 등 공인시험기관과 설비사용계약을 맺으면 시험검사설비를 활용할 수 있다. 공인시험기관인 KCL과 KTR은 국가기술표준원 산하 유관기관이다. KCL은 건축자재의 시험평가인증과 연구개발(R&D)을 수행하고, KTR은 화학ㆍ환경 시험연구인증과 기술개발을 맡는다. 매년 3만개 기업에 35만건의 시험성적서를 제공할 만큼 공신력이 있는 시험기관이다. 국가기술표준원 관계자는 “제품 출시 전 각종 시험검사를 해야 하는 영세업체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설비사용계약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기관들의 시험검사설비 사용비용은 KCL 473만원, KTR 447만원(이하 수수료 포함 비용)으로 저렴한 편이다. 협회가 의무적으로 구비하도록 요구한 시험검사설비 금액보다 10분의 1 적다.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 관계자는 “제품인증의 목적이 품질 제고이기 때문에 KCL, KTR 공인시험기관과 설비사용계약을 맺고 시험을 받는다고 해서 인증을 못 받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조업체들의 얘기는 다르다.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 측이 시험검사설비를 갖추지 않은 제조업체에 대해선 인증심사를 아예 진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B사 대표는 “시험검사설비를 모두 갖추지 않은 제조업체의 신청은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가 아예 받지도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협회 측은 제조업체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라고 맞받아쳤다. 협회 관계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제조업체가 자체적으로 시험검사설비를 구비하지 않으면 매번 공인시험기관에 방문해 시험을 의뢰해야 한다. 그때마다 움직여야 하는데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검사비용도 나중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품질을 위해 이 정도도 투자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제조업체 “협의서 고가 설비 구비 요구”
하지만 이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제조업체가 시험검사설비를 구비한다고 품질이 제고되는 건 아니라서다. B사 대표의 말이다. “협회의 주장처럼 품질을 위한 거라면 제조업체가 전문성과 공인성을 갖춰야 한다. 그렇다면 제조업체가 화학전공 담당자를 채용하는 것보다 공인시험기관의 시험검사설비를 활용해 시험을 받는 것이 적합하다. 공인시험기관은 전문성과 공인성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도로교통안전시설협회 측이 자신들이 추천한 업체의 시험검사설비만을 구입하도록 종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C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협회 전문위원에게 구비해야 할 시험검사설비의 정보를 문의했더니, 정보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특정업체를 거론하면서 그곳에서 맞추면(주문하면) 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김건희 더스쿠프 기자 kkh4792@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