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은 경험보다 세다
유영만의 생각체조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게 경험이 되는 건 아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에 대해 당신이 실제로 뭘 했는가가 경험이다.”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의 말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경험을 쌓을 수 없다. 단순한 해프닝이 내 체험으로 축적되기 위해서는 내 몸이 움직여 체화되는 산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주관적 ‘체험’이 객관적 ‘경험’보다 힘이 세다. 남의 경험보다는 나의 체험으로 배운 게 많아야 감성적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 경험은 스쳐 지나간 흔적이나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체험은 몸에 개인적으로 각인된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경험은 죽은 채로 과거 속에서 살아가지만 체험은 살아서 현재에서 빛을 발한다. 운전사는 체험하지만 조수는 경험한다. 조수의 간접 경험보다 운전사의 직접 체험이 백번 낫다. 체험 없는 경험의 축적은 공허할 뿐이고, 생각 없이 쌓는 체험은 맹목일 뿐이다.
체험적 통찰력은 몸부림에서 나오고, 그 몸부림은 굶주림과 함께 온다. 배부르면 몸부림치지 않는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나태함과 게으름을 친구로 살아간다. 굶주려야 굶주림을 극복하는 몸부림이 시작된다. 몸부림은 ‘몸’을 ‘부림’이다. 몸을 부리지 않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몸부림치는 노력이라야 작은 성취라도 이룰 수 있다. ‘몸부림’은 ‘몸’을 ‘부름’이다. 몸을 누군가가 또는 무엇인가가 불러야 몸부림친다.
몸이 부름을 받아야 몸부림치는 갈급함과 갈망이 시작된다. 갈급함과 간절함이 극에 달해야 몸부림치며, 몸부림치는 갈급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몸부림 끝에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몸부림치지 않고서는 위대함은 탄생하지 않는다. 몸부림은 다가감이다. 춥고 배고파야 몸부림치며, 몸부림쳐야 몸이 꿈의 부름을 받아 꿈의 목적지로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몸부림은 꿈으로 다가가는 처절함이자 치열함이다. 나는 지금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한가?
몸부림은 사무침이며 그리움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갈망하는 사람이라야 몸부림치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나는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가? 모든 몸부림은 치열한 몸부림 밖에 없다. 대강 대충 치는 몸부림은 없다. 열정에도 오로지 지독한 열정밖에 없듯이 몸부림에도 치열하고 처절한 몸부림밖에 없다. 치열하고 처절하지 않으면 몸부림이 아니다. 몸부림은 치열함이자 처절함이다. 몸부림은 무엇인가를 향한 지독함이며 누군가를 위한 처절함이다. 처절해야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문이 열리며, 불가능도 가능해진다.
그게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만들어가는 삶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빠른 시간 안에 성취했느냐보다 숱한 시간을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 내가 체험한 만큼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는지가 더 소중하다. 오늘도 나의 체험영역을 넓히고 동시에 체험의 깊이를 심화시키기 위해 뭔가를 체험하러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지금 떠나야 만날 수 있다. 떠나지 않으면 낯선 세상과 마주칠 수 없다.
유영만 한양대 교수 010000@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