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원천은 강압 아닌 관심”
36년 만의 여성 행장 권선주 기업은행장
2014-03-19 이필재 인터뷰 대기자
권선주(58) 기업은행장은 국내 첫 여성 은행장이다. 행원으로 은행권에 발을 들여놓은 지 36년 만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유리천장’을 깨고 행장으로 승진했다. 그에 앞서 1급 승진도 여성 최초였고 본부장도 여성으로서 가장 먼저 달았다. 그가 입행하기 3년 전까지만 해도 여행원의 경우 결혼하면 퇴직한다는 퇴직각서를 써야 했다. 올 2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은 권 행장을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50명’으로 선정했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했다. 기업은행(IBK)은 국내에서 인수ㆍ합병(M&A)을 겪지 않은 유일한 은행이다. 자산 224조원의 세계 105위 은행으로 구성원은 1만3000명에 이른다. 권 행장은 4월 6일 취임 100일을 맞는다.
✚ 올해 실적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나요? 경영의 주안점을 어디에 둘 겁니까?
“저성장ㆍ저금리의 지속으로 은행권 전체적으로 수익성 개선이 쉽지 않을 거로 봅니다. 그래도 IBK는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우산을 씌워주는 중소기업의 동반자 역할에 충실할 겁니다. 중소기업에 지난해보다 2조원 늘린 40조원을 연중 지원할 거에요. 더불어 중기 104사를 포함해 1400만명에 이르는 고객을 평생고객화하는 데 중점을 두려 합니다. 2016년 도입이 예고된 계좌이동제에 대비한 포석이기도 하고요. 개인정보 유출 방지책으로는 전직원 대상 연간 6시간 이상의 정보보안 교육을 통해 정보보호 마인드를 강화할 겁니다.”
✚ 여성의 강점 내지 여성 리더십의 특징이 뭐라고 보나요?
“주부로서 가정 경제를 꾸려나가고 자녀를 키우다 보면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한국에서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려면 거의 득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죠. 그래서 여성은 경청 능력이 뛰어날뿐더러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의 명함엔 휴대전화 번호가 인쇄돼 있다. 하루 50회가량 고객 및 직원과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이 가운데 약 60%가 직원과의 소통. “지난 인사에서 다른 부서로 옮기고 싶었는데 그렇게 안 됐다”는 청탁성(?) 메시지를 보내는 직원도 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다 이야기를 하면 그땐 청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인사와 관련한 내부 수요를 모두 수용할 순 없지만 직원들과 이런 직접 소통의 통로가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좋은 일이죠.”
지난달 초순 강원 영동지방에 연일 폭설이 내렸을 때의 일. 당시 IBK 강릉지점에 제설작업용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이 떴다. 강릉지점 김모 과장(여)에게서 “30㎝ 이상 눈을 치웠는 데도 아직 막막하다”는 카톡 메시지를 받은 그가 총무부장과 지역본부장에게 제설작업을 지원하라고 지시한 것. 고객 동향을 카톡을 통해 파악하기도 한다.
고객ㆍ직원과 ‘카카오톡 소통’
“취임 초 내실 경영을 하겠다고 했더니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려는 것 아니냐는 고객들의 우려가 있다고 우리 직원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중기에 대한 대출을 줄일 생각이 없는 데도요. 주요한 고객 동향이었죠.”
통상임금 문제로 고민 중이라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직접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숙성시킨 것이 하루 일정을 모두 현장 경영으로 채우는 프로그램 ‘현장 속으로 2014’이다.
내실 성장은 그가 취임일성으로 밝힌 경영방침 ‘희망의 금융(H.O.P.E)’의 핵심 내용이다. H.O.P.E는 내실 성장(Healthy IBK), 열린 소통(Open IBK), 시장 선도(Pioneering IBK), 책임경영(Empowering IBK)의 머릿글자를 딴 것. 내실 성장에 대한 철학은 일선 지점장 시절 생겼다. 1990년대 그가 처음 지점장으로 나갔을 때의 일이다. 여성 지점장이 드물던 시절. 사채업자 몇 사람이 거액을 들고와 예금했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특혜를 요구했다. 여자라서 실적을 올리느라 고전할 거로 내다본 듯했다. 그는 모든 요구를 거절하고 본점에 연락해 이들이 한 예금을 지점 실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위에서 계량적인 목표를 강조해 출혈 경쟁을 하다 보면 수익성이 저하되고 결국 금융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게 마련이죠.”
✚ 중소기업 CEO는 대부분 남자인데 여성 행장으로서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나요?
“고객 이탈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고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한 중소기업 CEO가 기업은행의 주인은 행장이 아니라 고객이라며 ‘주인인 우리가 제 집을 두고 어디로 가겠느냐’고 하더군요.”
✚ 어쨌든 카리스마적인 리더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요.
“맞습니다. 저는 언성을 높이는 일도, 야단을 치는 일도 없어요. 그러나 보고가 부실하다든지 하면 보고 받는 도중 그 자리에서 굉장히 실망스럽다고 말합니다. 또 꼼꼼하게 챙겨 다른 사업부와 사전 조율이 안 됐으면 피드백을 받아 보라고 지시해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구성원들이 우리 행장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이렇다 보니 저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요. 리더십은 강압적인 스타일이 아니라 업무에 대한 관심에서 나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시종 차분하게 일정한 어조로 답했다. 은행에 다닌 아버지의 권유로 방송기자의 꿈을 접고 은행원이 됐다는데 그의 언니도 은행원이었다고 한다. 권 행장은 지난해 최대주주인 정부로부터 사들인 자사주를 해외주식예탁증서(GDR) 발행 방식으로 매각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줄다리기를 했다. 자사주 매입으로 낮아진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이번에 회복하게 해달라는 그의 집요한 설득으로 정부는 구상 중이던 기업은행 지분 추가 매각을 미루기로 했다. 이 일로 그는 강단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권 행장은 25년가량을 영업 현장에서 보냈다. 영업 비밀 역시 경청. 지점장 시절 고객과 통화할 때면 대화 내용을 일일이 메모했다고 한다. 3개월 후 계약을 한 건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임박해 전화를 걸어 “계약건은 잘 돼 가느냐”고 물었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하면 이번엔 “현금 흐름이 좋지 않을 텐데 은행이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은행원은 현장 두려워해선 안 돼”
여성답게 디테일에도 강하다. 행장 취임 전 그는 2년 간 리스크관리본부장(부행장)을 지냈다. 은행엔 신용대출을 할 때 해당 대출이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 기록하는 서류가 있다. 오랫동안 이 서류 양식엔 대손충당금 기입란만 있었다. 대손준비금도 BIS 비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그의 지적에 따라 IBK는 이 양식을 수정했다. 그의 이런 면모는 직원들을 긴장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다.
✚ IBK의 고유한 기업문화는 뭔가요?
“직장에 대한 자긍심, 투지와 저력입니다. 고객이 통장을 해지하러 오면 다른 은행 사람들은 보통 군말 없이 해 줍니다. 반면 우리 직원들은 통장을 해지할 때의 비용과 불이익에 대해 설명하고 결국 계속 유지하게 만들죠. 심지어 IBK 지점이 있는 건물의 입주자들이 우리 직원들이 하도 집요해 피해 다닌다는 소리도 들려요. 이게 바로 우리의 경쟁력이죠.”
역대 IBK 행장들은 유독 현장 경영을 중시했다. 그 역시 구성원들에게 “은행원은 현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 현장이 왜 중요합니까?
“은행은 기본적으로 마케팅 조직이고 은행의 현장 경영이란 곧 고객과의 소통이에요. 과거엔 경청만 하면 됐다면 이제 마음을 연 대화를 하고 이해관계의 조율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고객에게서 모든 걸 배울 수 있습니다. 까다로운 고객에게서조차 인내심을 배울 수 있죠.”
이필재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